[조용래 칼럼] 3월에 거는 기대



아주 먼 옛날 어느 작은 왕국에 고집 센 독신 노인이 살았다. 그는 독설과 쓴 소리의 대가였다. 그의 발언은 사람들을 늘 언짢게 했다. 300년 넘게 이어져온 왕국의 멸망을 예언하고, 멀쩡한 신전이 곧 무너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참다못한 왕은 그를 옥에 가두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지인들을 통해 자기 고향에 있는 밭을 사겠다고 한다. 그것도 제값을 치르고 매매계약서를 반듯하게 만들어 옹기그릇에 잘 보관하란다. 나라가 곧 망한다고 외치던 이가 밭을 사고 문서를 보관하라고 하니 사람들은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더구나 그때는 이웃나라 군대가 왕국의 수도를 포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노인의 행보는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분명했다. 왕국이 망하고 신전이 무너져 내릴지라도 그 모든 폭풍이 지나고 나면 다시 일상적인 삶이 이어질 테니 그때를 대비하자는 뜻이었다(예레미야서 32:1∼15).

사실인즉 지금 위기에 내몰렸더라도 우리의 삶은 일상적으로 작동돼야 한다. 우리가 과거 35년이나 일제의 지배를 받았지만 그 올무에서 벗어나 오늘에 이른 것은 최소한의 일상성이 지켜졌기에 가능했다. 가정도 새로 꾸리고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각각의 생활전선에서 아등바등 땀 흘리면서도 많은 이들이 억울함을 꿋꿋하게 견뎌온 덕분이었다. 바로 일상성의 힘이다.

‘일상성에 매몰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일상의 매너리즘에 대한 경고다. 반면 우리가 추구하려는 일상성, 특히 프로테스탄티즘이 중시하는 것은 ‘일상 속에서의 성화(聖化)’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성과 속을 철저하게 구분했다면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티즘은 개개인이 자신의 규율 하에서, 즉 일상생활의 조직화를 통해 ‘세속 내 성화’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대표적인 것이 막스 베버가 강조한 ‘세속 내 금욕’이다.

최근 들어 한국 개신교인들의 역할은 종종 폄하되는 실정이지만 ‘일상 속에서의 성화’라는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그룹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잠재력은 무궁하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올해부터는 그 잠재력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전개됐으면 좋겠다. 그 첫째 과제로서 우리 사회의 일상성 문제에 대해 관심을 새롭게 가졌으면 싶다.

그야말로 요즘 한국사회는 일상성을 상실하고 있다. 탄핵정국 장기화가 직접적인 원인이다. 불신 불만 불안으로 이어지는 3불 정국 속에서 내정과 남북관계는 말할 나위도 없고 트럼프의 미국, 시진핑의 중국, 아베의 일본과의 현안들이 방치되면서 불안감은 증폭일로다. 게다가 탄핵정국을 마무리할 수 있는 사실상의 키를 쥐고 있는 헌법재판소는 연일 동네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주장을 펴고 신념에 찬 행보를 이어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이들의 사고와 행위에 대한 적대감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바람직하지 않다. 그 와중에 일상성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촛불을 켜는 것도 중요하고 태극기집회를 이어가는 것도 자유민주주의의 권리다. 하지만 우리의 삶, 각 사람의 가치가 조롱돼서는 안 된다. 각각의 현장에서 개신교인들의 일상 속 성화 노력이 발휘됐으면 한다.

종교적인 의식(儀式)과 유사할 정도로 종종 모든 이들에게 초월적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새로운 시간이다. 새해, 새 학년, 새 봄 등은 다시 시작하는 기회를 얻는다는 점에서 초월적이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새 학년 새 학기에 학생들은 새 힘을 얻어 새로 시작할 테다. 마찬가지로 올 3월은 한국사회가 새 나라, 새 미래를 열어가는 출발점이 됐으면 한다. 일상성의 힘, 초월적인 새 시간의 역사(役事)를 믿는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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