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광장은 공감세상 배려사회 원한다



애덤 스미스(1723∼90)는 시장경제의 속성을 ‘개개인의 이기심’에서 찾았다고 오해돼 왔다. 저서 ‘국부론(1776)’에 나오는 다음 발언 때문이다.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은 정육점·양조장·빵집 주인들의 자비심이 아니라 그들이 각각 이익(이기심)을 추구한 덕분이다.” 이 대목은 상품 교환의 동기만을 설명한 것인데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이기심’의 근거로 해석됐다.

결과적으로 18세기 스코틀랜드의 현인(賢人) 스미스는 탐심 가득한 시장경제 옹호자가 되고 말았다. 더불어 자본주의는 이기심을 옹호하는 체제라는 점만 부각됐다. 경제학의 합리적 선택이론이나, 신자유주의의 근거도 스미스에서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인간의 합리성이 곧 이기심이라고 주장해온 주류 경제학은 스미스에 대한 심각한 오독에 빠지고 말았다.

사실 시장경제의 주요 이슈는 교환 외에 생산 분배 유통 등의 분야가 더 있다. 스미스는 시장경제의 다양한 질서 속에서 활동하는 인간에 대해 이기심과 더불어 ‘공감’에 주목하면서 사회 질서의 번영 원리를 규명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의 첫 저작이자 임종하던 해에 개정판까지 냈던 ‘도덕감정론(1759)’의 핵심 주제가 바로 그것이다.

‘도덕감정론’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천성에는 타인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인간에게는 이기심이 있지만 다른 한편에 공감이라는 감정이 공존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기심에만 의지한 자본주의는 지속되기 어렵다. 압축성장의 한국형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한 이유다.

앞만 보고 달려온 한국사회는 이웃과 사회와 공감을 나누기보다 이기심을 갈고 닦는 데만 급급했다. 물론 이기심은 넘치는 성과를 냈다. 재빠른 산업화·공업화의 원동력이었으며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를 이뤄낸 근간이었다. 뭇 개발도상국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자괴감도 넘친다. 공감 부재의 이기심 세상의 결과다.

특히 한국사회는 공감 부재, 배려 실종의 패거리문화로 치달으면서 요동치고 있다. 국가와 사회와 공동체를 위한 기여보다 자기 자신과 패거리에 속한 내부자들만 우선시하는 사회로 전락한 것이다. 이기심은 극단화됐고 “돈도 ‘빽’도 실력”이라는 주장 속에서 상대적 박탈감은 증폭된다. 흙수저·금수저론이 나오는 배경이다.

공감과 배려 부재의 폐해는 모든 영역에서 확인된다. 국민이 처한 상황에 충분히 공감하지 못해 정말 도움이 필요한 계층에 대한 정부의 정책 대응은 미흡하기 일쑤다. 바로 정부 실패다. 동감하지 않아도 공감은 가능함에도 정치권은 제 주장만 앞세울 뿐 상대에 귀 기울이지 않으니 갈등만 요란하다. 게다가 유교적 권위주의는 공감·배려 부재를 더욱 부추긴다. 상명하달식 전근대적 지배구조가 여전하다.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위기다.

지금 한국사회를 온통 뒤흔들고 있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도 전형적인 공감 부재, 배려 실종이 빚어낸 참극이다. 비선실세는 패거리문화의 극단이고, 소통 부재의 전근대적 지배구조가 대통령의 전횡을 제어하지 못해 민주주의 절차는 흔들리고 말았다. 재벌들의 이기심과 최고 권력의 불통 권위주의가 부적절한 거래를 만들었다.

남북문제나 사드 배치, 위안부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상대와의 공감과 배려가 작동되는 외교안보 정책을 꾸준히 모색했더라면 사태가 지금처럼 심각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광장에서 요구하는 탄핵정국 이후의 세상은 공감과 배려가 살아 넘치는 새 사회다. 이는 대선 예비 주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요구되는 비전이다. 여기에 꼭 하나를 더한다면, 정직성을 꼽고 싶다. 나부터, 우리부터 그리 바뀌어야겠고.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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