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교회를 새롭게 세상을 빛나게




새해다. 오고 또 오는 세월일지라도 2017년은 좀 특별하다. 개혁의 때라서 그렇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촉발된 광장민주주의는 대통령 탄핵을 넘어 한국사회에 만연된 적폐를 일신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이는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점과도 맞물린다.

한국사회는 흔히 종교개혁을 신구교의 갈등 등 이른바 기독교계의 개혁문제로만 이해한다. 개신교 크리스천들조차도 그런 경향이 적지 않다. 따라서 종교개혁이란 용어를 비롯해 그 안에 담긴 내용까지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우선 ‘종교(宗敎)’란 용어부터 보자. 한자문화권인 한·중·일 3국은 오늘날 사용하는 용어 중 ‘일본이 19세기 서구문물을 수용하면서 만들어낸 번역어에 적잖이 의존한다. 사회 개인 자유 민권 철학 동산·부동산 등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중국의 공식명칭인 중화인민공화국 중 ‘인민’과 ‘공화국’도 일본발(發) 번역어다. ‘종교’도 그렇다. ‘religion’을 그리 번역한 것이다.

원래 ‘종교’는 불교의 하위개념이었다. ‘조계종’ ‘천태종’ 등 불교의 주요 유파를 ‘∼종’이라고 부른 바와 같다. 일본의 종교학자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1912∼99)는 궁극의 원리나 진리를 뜻하는 종(宗)의 가르침(敎)을 종교로, 즉 불교용어로 본다. 바로 그 종교가 religion의 번역어가 되면서 불교의 상위개념으로 역전됐다는 것이다.

불교 유교 도교 등이 주류였던 아시아권에 기독교가 가세해 이들을 통칭할 용어가 필요하게 됐다. 다만 당시 종교는 통칭인 동시에 이미지 상으로서는 사실상 기독교를 의미했다. 이것이 바로 16세기 유럽에서 벌어진 루터 등의 개혁운동을 종교개혁이라고 번역해 부르게 된 배경이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물론 기독교다.

역사학에서는 유럽에서 프로테스탄트 등장과정을 통틀어 ‘개혁(The Reformation)’으로 부른다. 기독교개혁, 가톨릭개혁은 공식용어가 아니다. 기독교권에서 벌어진 변혁이니만큼 그들에게는 ‘개혁’이라고 불려도 충분히 이해됐을 것이다. 다만 종교개혁은 루터 이전부터 이후 수세기 동안 이어지기에 세부 구분이 필요할 땐, 예컨대 루터 시대의 종교개혁은 ‘16·17세기 개혁’으로 쓴다.

그들이 지칭하는 그 ‘개혁’은 단순히 교회·교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일반의 변혁과정을 망라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근대 일본의 번역과 관련해 빚진 바 크지만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다. 번역어 ‘종교개혁’엔 개혁의 범주와 대상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종교개혁을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것으로 오해하게 된 원인이 바로 이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지금 우리는 번역어 ‘종교개혁’이 담아내주지 못하는 내용을 곱씹어봐야 한다.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로 개혁의 대상은 교회와 사회, 즉 삶의 전 영역에 걸쳐 있다는 점이다. 그 개혁은 인류의 유산이다. 둘째로 개혁은 일회적·단기적이지 않으며 지속돼야 한다는 점이다. 개혁의 포괄성과 지속성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한국 교계가 국민일보·CBS와 함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나부터∼’ 캠페인을 펼치고 자성과 변혁운동을 전개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종교개혁의 대상이 교회·교계만이 아니라 크리스천 개개인이 몸담아 살고 있는 세상 전부임을 고백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국민일보는 ‘교회를 새롭게 세상을 빛나게’라는 슬로건을 들고 올 한해를 매진하기로 천명했다. 촛불이 광장에서 호소하는 것처럼 스스로 주변을 정갈하게 하면서 세상을 빛나게 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는 노력들이 곳곳에서 박차일어나기를 희망한다. ‘개혁 2017’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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