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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역사여행] 우리말 성서 번역 선각자, 한국 복음화 길을 열다
멀리 노령산맥 괘일산 정상이 보인다. 곡성 옥과 출신으로 괘일산 자락에 살던 이수정은 이 길을 통해 한양을 드나들었다. 유현종 소설 ‘들불’에서는 부산에서 전도활동을 하던 이수정이 전도한 매서인들이 동학농민전쟁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수정 (1842~1886·생몰 추정)   일본 기독교인들과 함께한 이수정(앞줄 왼쪽부터 다섯 번째).   이수정(뒷줄 중앙)과 그를 전도했던 낙스(뒷줄 왼쪽 첫 번째) 선교사.   이수정이 세례받은 도쿄 노게스초교회 현재 모습. 당시 낙스 선교사가 입회...
입력:2021-02-05 18:00:01
[한국기독역사여행] 일제 갖은 고문 속에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다
독립운동가 선우훈 장로가 1912년 1월 일제 헌병들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던 서울 남산 옛 조선총독부 터. 숭의여전 교문에서 본 풍경으로 ‘서울 애니메이션센터’ 공사가 한창이다. 1950~70년대 KBS·국토통일원 자리이기도 했다. 이 일대는 총독부 부속 건물이 즐비했다. 선우훈은 고문을 이겨내고 끝까지 저항했다.   청계천2가 수표교. 선우훈이 포승에 묶여 총독부로 끌려가며 한탄하던 곳이다.   총독부 터 앞길. ‘국치의 길’로 역사 답사 코스다.   일제가 작성한 항일인사 기록 카드. 선우훈은 19세에 ...
입력:2021-01-22 17:10:01
[한국기독역사여행] “주님 위해 살겠습니다” 낮은 곳에 말씀의 빛을 비추다
서울 도원동 용산제일교회. 2018년 11월 어느 주일 아침 모습이다. 한국의 영성운동과 빈민구제에 힘쓴 강순명 목사가 천막을 치고 시작했던 옛 도원동교회(아래 흑백 사진) 터이기도 하다. 강순명은 해방~6·25전쟁 기간 용산역 뒤편 지금의 백범로를 중심으로 영혼 구원에 힘썼다.   전도사관학교였던 연경원을 찾은 백범 김구(앞줄 중앙)와 아들을 안고 있는 강순명(백범 오른쪽).   광주광역시 천혜경로원 1950년대(추정) 모습. 백범과 사진을 찍었던 그 아들이 현 원장이다.   용산역 철로. 넝마주이 등에게 복음을 전하던 교...
입력:2021-01-08 17:25:01
[한국기독역사여행] 회개한 바울처럼… 삶으로 가난한 이웃을 품다
무등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1시간 남짓 걸어 올라가면 만나는 오방수련원. 호남 영맥을 잇는 오방 최흥종 목사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전후 걸인과 결핵·한센씨병 환자를 거두어 보살피던 산속 예배당이었다. 이 수련원은 현재 종교화해와 소통 모임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무등산 증심사 위 신림기도처(현 오방수련원) 초가 앞에서의 최흥종 목사(오른쪽).   유진 벨과 조선 청년들을 교육했던 최흥종. 광주 숭일학교 옛터 기념석과 교정 향나무다.   옛 광주제중원. 최흥종이 나환자와 결핵환자를 구제했던 곳이다. 광주 ...
입력:2020-12-04 17:20:01
[한국기독역사여행] 미국 열차에서 출발한 하나님 선교 역사, 조선에 이르다
서울 YMCA 뒤편 중앙감리교회 ‘가우처 기념예배당’ 터(노랑 점선). 1920년대 건립된 예배당은 1975년 민간에 매각됐고 2015년 무렵까지 남아 있었다. 왼쪽 위 붉은 예배당은 승동장로교회. 강민석 선임기자   존 프랭클린 가우처 (1845~1922)   매클레이 선교사와 김옥균. 조선의 교육·의료 선교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일본 청산학원대학의 관동대지진 전 모습. 가우처 기부로 세워졌다.   1950년대 추정 승동교회 뒤로 보이는 가우처 기념예배당(화살표).   2004년 출판사 창고로 사...
입력:2020-11-20 17:05:01
[한국기독역사여행] 망명가 이 박사 부인의 연단, 성경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망명가 이 박사 부인 집’으로 불렸던 창신동 지장암 일대. 동대문역에서 혜화문 방향 660m 지점이다. 왼쪽 도성으로 들어서면 이화장이 눈 아래로 보인다.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은 본처 박승선 전도사를 반기지 않았다. 프란체스카와의 결혼은 사실상 중혼이었다.   현 이화장 경내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이곳에서 초대 내각이 구성됐다.   서울 정동 배재학당과 아펜젤러 선교사 동상. 이승만은 배재학당 입학 후 신앙을 가졌다.   박승선 전도사가 출가 전 살던 서묘 일대. 지금의 한국은행 일부로 남대...
입력:2020-11-06 17:15:01
[한국기독역사여행] “복음 위해 섬 끝까지 가리다”… 소명, 끝섬에 닿다
1950~70년대 전북 군산 앞바다 고군산군도 11개섬 복음화에 힘쓴 추명순 전도사를 기리기 위한 활동이 시작됐다. ‘기도의 어머니’로도 불리던 추명순 전도사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이고 목회자가 된 이들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사진은 1980년대 추 전도사가 섬과 섬 사이를 잇는 노둣길을 따라 전도에 나서는 모습이다. 추명순 전도사 기념사업회 제공   1960년대 초로 추정되는 말도교회 모습.   추명순 전도사 (1908~1994)   1989년 무렵 말도교회 3대 임봉학 목사와 설립자 추명순.   ...
입력:2020-10-23 16:35:01
[한국기독역사여행] “장차 조선교회 위해 내 남편 순교 제물로 달라시니…”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중로 삼거리 모습.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로 평양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던 한상동 목사 등을 옥바라지하던 김차숙 사모가 사식 등을 준비하던 곳이다. 1940년대 후반 김차숙의 여동생 김인숙 부부가 이곳에서 약방과 잡화점을 운영했다. 지금도 약국과 마트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이곳 웅천은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고향이기도 하다.   예장고신 측 모태 삼일교회. 1951년 6·25전쟁 중 설립.   김차숙 (1902~1977)   주기철·한상동 목사가 담임했던 부산 초량교회. 예장합동 측.   김차숙이 옥바라지...
입력:2020-10-09 17:20:01
[한국기독역사여행] “위기의 한국 도와야 합니다”… 믿음의 자녀, 총을 들다
서울 은평평화공원의 쇼 대위 동상. 이 자리는 1950년 9월 ‘녹번리 전투’가 있었던 백련산 자락이다.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 아들 쇼는 서울 탈환을 위해 진격하다 인민군 매복조 총탄에 숨졌다. 뒤로 보이는 교회는 1954년 설립된 은평감리교회다. 독립운동가 윤성렬 목사가 6·25전쟁 때 아들 윤대영을 금화고지 전투에서 잃고 설립한 기념교회다.   1939년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한 쇼(왼쪽)가 미국 유학에 앞서 아버지 서위렴과 찍은 사진.   쇼 대위 부인 주아니타(앉은 사람)와 차남 스티븐 쇼 부부.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입력:2020-09-18 17:45:01
[한국기독역사여행] “하나님 앞에 평등”… 화산 같은 기개로 권위주의에 맞서다
전북 정읍시 태인면 매계교회(예장합동 측) 전경. 1910년 전후로 동학농민군 출신 최중진 목사가 목회했던 곳이다. 최중진은 정읍 고창 김제 등을 전도 구역으로 삼았다. 미국남장로회 전주선교부 선교사들의 지나친 서구식 목회에 반발한 최중진은 민족주의 기독교 성향을 보임으로써 결국 제명당하고 만다. 아래 흑백 사진은 초기 매계교회다.   최중진 목사 (1871~1932)   믿음의 삼형제. 왼쪽부터 최중진, 광진(장로), 대진(목사).   평양신학교 2회 졸업생들과 최중진(앞줄 맨 오른쪽).   최중진에 의해 설립된 정읍제일교회(기...
입력:2020-09-04 17:10:02
[한국기독역사여행] 노예, 여자 해방… ‘해방의 복음’으로 일제에 맞서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의 정신여학교(서울 정신여·중고 전신) 학생 및 교사 시절 학교 본관(가운데 붉은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됐다. 김마리아 흉상은 본관과 강의동 사이 회화나무 아래 있다. 본관 뒤 흰 건물이 서울보증보험, 그 뒤가 연동교회다. 아래 흑백 사진은 1912년 찍은 본관이다. ‘언더우드관’으로 불렸으며 400여년 수령의 회화나무가 보인다. 정신여·중고는 1978년 이전하면서 용지를 매각, 개인 소유가 됐다. 새 소유자의 유언에 따라 본관과 강의동·강당(사진 왼쪽), 운동장(주차장) 등이 보존되고 있다.   ...
입력:2020-08-21 17:20:01
[한국기독역사여행] 세상 즐거움 버리고 조선의 전염병과 싸우다
1938년 완공된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의 성’ 풍경. 의료선교사 윌리엄 홀 부부의 아들 셔우드 홀 부부의 안식처였다. 그러나 황해도 해주 구세병원 사역을 했던 셔우드 부부는 일제 말 미국으로 쫓겨난다. 이어 남북이 갈리면서 김일성 별장이 됐다. 원래 2층이었으나 군 관리 시기 3층으로 증축됐다.   셔우드 홀 (1893~1991)   어머니 로제타 홀을 모시고 기념 촬영한 셔우드 홀 부부.   해주 구세병원 관계자 등과 함께한 셔우드 홀(앞줄 왼쪽 네 번째).   셔우드는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실 발행 사업을 ...
입력:2020-08-07 17:2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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