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 삶 보듬기] 교회는 생명 공동체이다!

민경엽 목사
(나침반교회 담임)


교회는 피 묻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장하고 또 주장해야
교회는 윤리공동체이기 이전에 생명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인 벤자민 프랭클린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고 싶다는 계획을 한 적이 있다. 그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고 살고 싶었다. 그래서 “배 부르도록 먹지 말라”라는 말부터 술은 마시되 취하도록 마시지 말라,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 서로에게 이익이 없는 일에는 돈을 쓰지 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화내지 말고 관용을 베풀라, 항상 몸과 의복과 주변을 청결하게 하라, 예수님과 소크라테스를 본 받아라 등 13가지 덕목을 선정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이 13가지 덕목을 일주일에 하나씩 자기 것으로 만들면 충분히 자신을 통제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매일 저녁 일기장에 자기를 평가하면서 그 날의 과제 덕목을 실천하는데 실패하면 굵은 점을 찍어 두었다. 어렵사리 이 과정을 진행한 뒤에 그는 마침내 자신의 실패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술을 취하도록 마시지 말라’는 항목을 위해 노력했겠지만 그는 유명한 술주정뱅이로 비난을 받을 정도의 주당이었다. 그런가 하면 다른 글에서 “맥주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라고 말하는가 하면 “술은 사람을 해하는 몹쓸 것이니 몽땅 마셔 없애야 한다”는 등의 궤변을 늘어놓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했다.

성경에 나오는 한 부자 청년은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다 지켰고 영적인 일에 관심이 많아 예수님 앞에 나와서도 영생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런데 그가 한 가지 알지 못한 것은 영생은 무슨 계명을 지키거나 선한 일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비극적인(?)’ 사실이다. 영생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된다. 영생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임에도 부자 청년은 막상 영생의 주인되신 예수님 앞에 나와서도 영생을 얻기 위해 행할 더 선한 일을 물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사람은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는 누구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 500년 전에 말틴 루터에 의해서 촉발된 종교개혁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선행을 행해야 영생을 얻게 된다는 가르침에 반기를 든 것이다. 당시는 그 도가 지나쳐 면죄부를 사야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까지 있었다. 루터는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로마의 라테란 성당의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 연옥에서의 형벌이 감해진다고 믿었다. 그는 성당을 찾아 스칼라 상타라는 28계단을 손과 무릎으로 오르다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을 깨달았다.

요즘 신학계에서는 ‘칭의’의 논쟁이 한참이다. 오늘날 칭의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믿음으로 의로워진 단순한 믿음의 원리로 인해 현대 교인들이 방종한 삶을 살고 있다는 반성에서 비롯됐다.  사실 ‘믿음 따로 행동 따로’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너무나 오랫동안 방치했다. 단순하고 쉬운 믿음의 진리를 오용하고 남용한 것에 대한 책임은 어쩌면 교회에 있다. 교인들은 마땅히 행동으로 믿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지만 칭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만 의존하여 이루어지는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그 어떤 것보다 믿음의 진리를 강조하는 것에 힘을 쏟아야 한다.

예수님 옆에 있던 한 강도가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마지막 순간에 고백한 한 마디 때문에 구원을 받는 극적인 장면보다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언하는 사건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피 묻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장하고 또 주장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이런 ‘상투적인’ 신앙의 핵심 진리를 교회 강단에서는 더욱 자주 선포해야 한다. 교회는 윤리 공동체이기 이전에 생명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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