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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만남] "나를 만난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 졌으면 합니다"

세계한인재단을 이끌고 있는 박상원 회장은 한국에서부터 더 많은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와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이런 정책이 장기적으로 한국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정책이라는 주장이다. 박상원 회장이 이민정책을 비교해 가며 설명하고 있다.
 
박상원 회장이 관려하고 있는 또 다른 한인단체인 박용만 기념재단 관계자들이 최근 한인타운 모처에 모여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준비하는 모임을 가졌다. 박용만 회장(앞줄 왼쪽에서 4번째)과 관계자들이 모임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미주 한인사회의 역사가 100년이 넘었다. 주 의회 정치권에서 한인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정치활동을 펼치는 사람도 생겼고 다른 커뮤니티에서 무시할 수 없는 경제력을 지난 공동체로 자리매김했다. 맨손으로 이민생활을 시작해 팍팍한 삶을 살면서도 커뮤니티를 위해 때로는 시간과 정열을, 때로는 물질을 쏟아낸 이민 1세들의 땀과 노력들 덕분이다.

국민일보 ‘릴레이 만남’은 커뮤니티를 위해 봉사해 온 사람들, 성공적인 사업을 이끌면서 갖 이민 온 이민 새내기들의 목표가 되는 사람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 남을 위해 노력해 온 사람들을 한명 한 명 만나 그들의 삶을 엿볼 예정이다.

처음 만난 사람이 다음 사람을 추천하고 또 다음 사람이 그 다음 사람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한인 커뮤니티 안에서 또 하나의 인연의 고리를 만들어 갈 계획이다. (편집자 주)



“교육과 신앙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육사업은 후세들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것이고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이어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주한인재단을 이끌면서 미주 한인의 날을 전국적인 선포의 날로 인정받는데 주역을 담당해 온 세계한인재단 박상원 총회장(전 미주 한인재단 전국총회장)의 말이다. 1992년 LA지역에서 일어난 흑인 폭동을 계기로 커뮤니티 활동을 시작해 20여년이 넘게 한 결 같이 일을 해왔다. 최근에는 일제치하 해외 무력투쟁을 이끌었던 박용만 장군 기념재단 회장을 담당하고 박 장군의 생애와 삶이 재조명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또 세계한인재단 총회장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의 마음을 모으는 역할에 주력하고 있다.

철학 있는 교육사업

현재 박상원 회장이 관여하고 있는 사업은 교육사업이다. 세인트 미션 유니버스티를 운영하고 있다. 남가주 지역에서 한인이 운영하는 통신전문대학이다. 인터넷으로 강좌를 듣고 정해진 학점을 이수하면 학위를 수여받도록 되어 있다. 박상원 회장은 “학교는 신학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 진 곳이다. 전체 학생 900여명 중 85% 정도는 신학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그 외 학과에는 25%의 학생들이 재학 중이다”고 설명했다. 세인트 미션 유니버스티의 신학
과정에는 기독교상담학, 기독교교육학, 일반신학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 외 기타 학과로는 다른 학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한국학과, 미국학과, 시즘(CISM) 스포츠 학과다.

미국이나 해외에 거주하는 1.5세나 2세 등 후손들이 한국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한국의 역사나, 문화, 정치 등을 소개하는 학과다. 미국학과는 미국의 사회 시스템을 학문적으로 재구성해 보다 미국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과정이다. 미국학과는 한국 4년제 대학에 만들어진 학과를 벤치마킹 했다. 박 회장은 “시즘스포츠학과는 각 나라마다 따로 있는 군대의 독특한 체육과정을 모아둔 것이다. 각 나라의 군대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체력단련 과정을 비교하고 탐구하는 학과다”고 설명했다.

미국 이민 더 많아져야

그 외 박상원 회장이 주력하는 또 하나의 사업은 이민사업이다. 세계한인재단이 추진하고 있는 ‘1000만 한국인 미국 이민운동’과 맞물려 있다. 커뮤니티 봉사사업이기도 하고 전문적인 분야에 들어가서는 전문가들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수익 사업이기도 하다. 박 회장은 “아직도 해외 이민자들의 수가 늘어나야 한다고 믿고 있다. 특히 미국으로의 이민은 더 장려되어야 한다. 한국 정부는 해외 이민자들의 권익을 늘리는 정책을 펴고 이민을 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회장은 “한 나라에 이민자들의 수가 늘어나고 커뮤니티의 경제규모가 확산되면 다른 민족 커뮤니티가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그리고 정치권의 영향을 줄 수 있는 표수가 늘어나면 친한파 정치인들이 늘어나게 되고 더 많은 친한 정책들이 만들어 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회장은 한국정부를 향해서는 이민 정책이 장려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한국에서 이민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민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이를 돕겠다는 의지다. 또 성공적인 이민생활을 위해서 꼭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박상원 회장은 “커뮤니티를 위한 봉사를 하면서 자신의 수익사업과 맞물릴 수 있다며 덧없이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며 “거기서 얻어진 수익을 다시 사회에 환원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다면 봉사단체들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운영자금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폭동의 아이러니

커뮤니티를 위한 봉사와 생계를 위한 삶을 연결시켜 새로운 시도를 추구하고 있는 박상원 회장은 지난 1992년 LA폭동을 겪고 난 후 커뮤니티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하고 있는 사업과 맞물려 하나 둘 커뮤니티의 진면목을 목격하고 뭉쳐야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박상원 회장은 “당시 운송업을 하고 있었다. 몇 대의 트럭을 배치해 운송을 돕는 일이다. 경기가 좋을 때는 월 10만 달러의 수입을 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 폭동이 일어난 1992년부터 1998년까지 가장 운수업이 잘 됐던 때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폭동 당시 박 회장은 지인들에게 도움을 주기위해 흥사단을 나가기 시작했다. 대학생 때 한국의 흥사단 활동을 해왔던 터라 선후배가 만날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폭동의 불길이 사그라들기 시작할 때는 한인들이 미쳐 챙겨 나오지 못한 한인들의 재산을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 폐허가 된 건물 잔해 속에서 덩그라니 남아있는 금고를 수없이 많이 들고 나왔다. 박 회장은 “당시 흑인지역에서 금은방이나 전당포를 하던 한인들은 많은 재산을 금고에 넣고 몸만 도망나와야 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에게 그 금고는 전 재산이기도 하고 이민의 삶 전부이기도 했다. 당시 그 지역에 들어가 금고를 가지고 나오려면 많은 인맥도 필요했고, 그만한 기술도 있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박상원 회장은 그 후 당시 한국의 대선후보 중 한 명이었던 이인제 후보를 지원하는 미주캠프 사무총장으로 일하면서 커뮤니티 활동을 본격화 했다.

고난을 통해 더 가까이

신학공부까지 끝낸 장로이기도 한 박상원 회장이 신앙을 갖게 된 것은 미국 이민 후다. 그래서 미국에서의 교회봉사와 신앙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다. 박 회장은 “처음에는 교회 출석 안 하고 돌아오는 교인이었다. 그 후 2002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신앙의 기쁨을 알았다. 그리고 2008년경 장로 장립을 받았다. 당시 하나님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뜨거워지는 신앙에 비해 삶은 어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운송회사를 접고 시작한 투자회사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겪으면서 급격하게 쇠하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모은 재산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박상원 회장은 “투자회사를 처음 설립했을 때는 꽤 재미있었다. 일이 잘 풀렸고 자연스럽게 재산이 늘어났다. 하지만 세계적인 어려움이 몰아치면서 내 사업 역시 살아남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당시 내사업이 가장 선두에서 그 폭풍을 다 맞아야 했었다”고 회상했다. 계속해서 박 회장은 “사업이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모았던 재산들을 처분하고 하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의 방법으로 새로운 복을 주실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고 말했다.

박상원 회장은 그 때 얻은 깨달음으로 지금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고백했다. 나만 돈 벌면 된다는 생각에서 함께 성장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현재 세계한인재단에서 추구하는 봉사와 삶의 모습도 이런 박 회장의 삶을 기초로 만들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상원 회장은 “세상에는 많은 만남이 있다. 득이 되는 만남, 해가 되는 만남. 나를 만난 사람들의 고백 속에 나와의 만남이 항상 득이 되는 만남이라는 말이 담겼으면 한다. 나를 만나서 어려움이 해결되고 삶이 보다 윤택해지고, 위로를 얻고, 과거의 많은 경험들이 모여 행복을 나눠주는 삶으로 마무리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말했다.

신정호 기자 jhshin@kukminu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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