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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만남] ‘좋아 좋아 서울’ - 재즈와 색소폰, 그리고 하나님

정창균 목사가 색소폰 3개를 동시에 연주하고 있다.
 
정창균 목사의 연주실력은 지난 2006년 KBS 열림음악회를 통해 한국 음악인들에게
소개됐다.
 
 
월드재즈가스펠미션 대표 정창균 목사(오른쪽)와 정태미 사모는 연주나 간증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 부부가 재즈에 얽힌 긴 이야기를 마치고 서로 마주보며 웃고 있다.
 

 

무지개가 떠오르는 세종로 용맹스러운 충무공을 바라보며 / 비둘기가 춤을 추는 시청 앞 아이들이 뛰어놀며 기뻐하네 / - 중략 - / 좋아 좋아 서울 하나님이 보호하는 대한민국

지난 20일 유투브에 올라 회자되는 좋아좋아 서울(Proud Seoul)의 일부다. 3개의 색소폰을 동시에 부르는 것으로 큰 화제가 됐던 정창균 목사(월드재즈가스펠미션 대표)가 곡을 만들고 부인인 정태미 사모가 노래한 곡이다. 노래는 광화문 사거리의 모습을 그리며 서울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담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서울의 발전을 기원하고 하나님께서 대 한민국을 도와달라는 기도로 끝을 맺는다. 월드재즈가스펠미션 소속의 정창균 가스펠빅밴드가 연주를 했고 정 목사의 맛깔스러운 색소폰 연주는 덤으로 들어 있다. 곡을 만든 정창균 목사는 “지난 2010년에 서울을 22년 만에 갔다. 함께 공연을 준비하던 단원이 내가 감격해 하는 모습을 보며 서울에 대해 노래를 만들어 보라고 제안했다. 그 때부터 고민했던 것이 얼마 전에 마무리됐다”고 말했다.

정태미 사모는 “노래가 유투브에 올라간 후 방문자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노래를 듣고 나서 노래 분위기와 노랫말이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며 서울에 가고 싶다는 글들을 남기고 있다”고 말했다. 연주를 한 정창균 가스펠빅밴드는 10인조로 구성된 악단이다. 재즈를 기초로 했던 사람들이 모여 재즈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활동하고 있는 그룹이다. 노래는 유투브에서 ‘좋아 좋아 서울 (Proud Seoul) 정태미’라는 말로 검색하면 찾을 수 있다.

시작되는 재즈사랑

정창균 목사가 재즈를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다. 원래부터 음악을 좋아해 피아노와 기타는 물론 트럼펫과 바이올린 등을 연주하기 좋아하던 정 목사는 우연히 라디오 에서 나온 색소폰 소리를 듣고 색소폰에 빠졌다. 그 때부터 무작정 연습했다. 정창균 목사는 “색소폰을 불기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서울시민회관 악단에 입단했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음에도 음악이 하고 싶어 나이를 속이고 입단했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에게 재즈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정 목사는 그 때부터 재즈의 깊은 맛을 들이기 시작해 1968년 파월 월남 청룡연예대대에서 악단장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그리고 1972년 당시로는 제일가는 재즈바인 스타더스트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거기서 재즈의 대가로 알려진 이정석 씨와 김판근 씨를 만나고 김 씨에게 재즈의 이론과 실제를 체계적으로 배워갔다.

정창균 목사는 “몇 년 후 1975년 미국으로 이민 왔다. 명목은 6인조 여성그룹을 미국에 알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목적은 재즈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재즈를 공부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미국에 도착한 후 정 목사는 그룹의 리드 보컬인 정태미 씨와 사랑을 키웠고 결국 결혼에 골인했다. 하지만 삶은 여의치 않았다. 음악인으로만 활동해 온 두 부부는 생계를 위해 시애틀에서 나이크 클럽을 오픈하기도 했다. 정태미 사모는 “그때는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다. 당시 중국계 커뮤니티에 이름이 알려져 비즈니스가 아주 잘 됐었다. 시간이 갈수록 일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남편과 내 마음 속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고민 끝에 비즈니스를 접고 이주를 마음 먹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정창균 목사는 그러면서 꾸준히 연주활동을 해 왔다. 1984년에는 UC버클리에서 개최하는 코키로크른 재즈페스티벌에 참가하기도 하고 1985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듀크앨링턴 추모 재즈쇼에 참가했다. 같은 해 작은 체구의 동양인으로 올스타 재즈 빅밴드를 지휘해 지역에서 주목 받기도 했다.

재즈인생 제2막

나이트 클럽을 접은 정창균 목사 부부는 로스앤젤레스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때가 1986년. 음악에 대한 열정은 있었지만 발목을 잡은 것은 삶이었다. 정창균 목사는 고민이 깊어져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을 만나게 됐다.

정 목사는 “당시 나성순복음교회에서 열린 조용기 목사 초청 부흥성회가 개최됐었다. 그전부터 교회를 다니긴 했지만 중생의 체험없이 다니다가 부흥회 때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었던 불면증을 치료받았다”고 설명했다. 정창균 목사는 그 후 두 번째 재즈 인생을 열게된다. 재즈만을 위한 정 목사의 삶이 이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로 재즈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로스앤젤레스 칼리지를 졸업 한 후 음악공부를 위해 칼스테이트로 진학하려고 했던 계획을 바꿨다. 진로를 바꿔 골든게이트 신학교에 입학해 신학공부를 했다.

정창균 목사는 “제일 잘 할 수 있는 재즈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었다. 당시는 사회분위기상 술집 음악을 교회에 가지고 들어온다는 식의 색안경을 끼는 사람들 많았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는 음악적인 장르의 구속이 없다는 믿음으로 아직까지 그 소신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990년부터 기회가 될 때마다 찬송가를 재즈로 편곡해 연주했었다. 하지만 중생의 체험이 있고나서부터 재즈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확고해 졌다.

세계유일 3개 색소폰 연주

정창균 목사의 트레이드마크인 3개 색소폰 동시 연주는 1997년 새벽기도를 하면서 영감을 얻었다. 이전까지 두 개의 색소폰을 함께 연주하기는 했지만 하나를 더 불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은 없었다. 정 목사는 “새벽기도를 하는 중 하나를 더 불어라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리고 내가 크게 더 쓸것이다라는 감동이 왔다. 그때부터 매일 새벽기도가 끝나고 나면 그린피스팍에 올라가 연습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1년 6개월 만에 빌리칼리지 재즈교수인 우디 제임스의 도움을 받아 3개의 색소폰으로 대중 앞에 섰다.

정창균 목사는 7분짜리 곡인 ‘나의 주님(My Lord)’을 연주했다. 그 안에는 정 목사의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었다. 이 장면이 유력 일간지인 엘에이 타임스를 통해 보도됐다. 미국에서도 흑인 재즈연주인 로산 로랜드가 지난 1975년 타개하면서 3개의 색소폰을 동시에 연주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 수 십 년 만에 다시 나타난 셈이다. 이 후 정창균 목사의 이름 앞에는 ‘3개 색소폰’을 부는 사람으로 수식어가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2006년 한국의 KBS에서 방송된 열린음악회에 초청받아 연주를 하는 것을 시작으로 2008년 SBS 스타킹에 출연 해 방송을 탔다. 그리고 2010년에는 한국 기독교 음악계에서 최초로 서울광장에서 콘서트를 개최했다. 정창균 재즈 가스펠 심포니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이뤄진 공연은 한국의 기독교 텔레비전 방송인 CTSTV 창립기념으로 전국에 생방송되기도 했다. 정 목사는 “한국에서 방송에 출연 한 후 많은 문의가 오기도 했다. 그리고 방송관계자의 소개를 받아 기네스 북 담당자를 만나게 됐고 세계 유일한 색소폰 연주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고 설명했다.

정태미 사모는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정말 큰 열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워낙 꼼꼼한 성격이라 집안의 모든 일도 도맡아서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나서부터는 날마다 은혜 속에 살아가는 것을 느낀다. 찬양하고 간증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 기회가 주어질 때까지 이일을 계속해서 하고 싶다”고 말했다.

신정호 기자 jhshin@kukminu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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