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nd 경제인사이드] 하늘위의 그녀들





1994년 개봉한 영화 중경삼림(重慶森林)의 마지막 장면. 항공기 승무원이었던 전(前) 연인을 잊지 못하는 경찰(량차오웨이)과 그를 짝사랑하는 패스트 푸드점 점원(왕페이)이 1년 만에 재회하는 순간이다. 샐러드 바에서 일하던 소녀는 사랑하는 이의 옛 사랑과 같은 승무원이 됐다. 새하얀 유니폼을 입고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은 지금까지 전 세계 영화팬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영화 배경인 홍콩은 당시 영국에서 중국으로 귀속되기 직전이었다. 혼란이 가득했던 시기였다. 평론가들은 극 중 승무원을 ‘자유’와 ‘도전’의 상징이자 세련되고 현대화된 인간상으로 분석한다. 불확실성이 만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으로 운명을 개척해 사랑을 쟁취하거나 꿈을 이루는 존재라는 것이다.
 
23년이 지난 지금도 항공사 승무원에 대한 이미지는 비슷하다. 모두가 동경하고 아무나 할 수 없는 특별한 직업이란 인식이다. 남성 승무원이 늘어나면서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한번쯤은 도전하고 싶어한다. 단정하고 반듯한 용모에 미소를 띤 얼굴로 대표되는 승무원의 세계는 그만큼 화려하다.
 
그러나 이면에 가려진 고충도 많다. ‘항공의 꽃’이라 불리지만 ‘감정 노동의 끝판왕’으로도 유명한 승무원 제도는 언제 시작됐고,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승무원의 역사
 
승무원을 최초로 고용한 항공사는 1928년 독일의 루프트한자였다. 그러나 남성 승무원이 전부였다. 첫 여성 승무원은 미국 유나이티드 항공의 전신인 보잉 항공수송회사가 1930년 채용한 미 아이오와 주 출신의 간호사 ‘앨런 처치’였다. 그녀는 당초 보잉사에 조종사로서 취업하길 희망했지만 제안이 거절당하자 끈질긴 요구 끝에 타협안으로 승무원이 됐다.
 
당시 회사는 ‘간호사 자격을 갖춘, 성격이 원만하고 교양이 있으며 키 162㎝이하, 몸무게 51㎏ 이하, 나이 20∼26세 이하의 독신여성’이라는 차별적인 조건을 달았다. 당시 항공기 객실이 좁고 천장이 낮았기 때문에 외소한 체형의 승무원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양질의 서비스가 호평받기 시작하면서 미국 내 20여 개 항공사가 모두 여성 객실승무원 제도를 채택하게 된다. 유럽에서도 에어프랑스의 전신 파아망 항공사가 국제선에 여성 승무원을 탑승시켰으며 1934년 스위스항공이, 이듬해엔 네덜란드의 KLM, 1938년엔 루프트한자가 이 제도를 운용했다.
 
앨런 처치가 활약하던 당시 여성 승무원들은 ‘에어 호스티스(Air Hostess)’또는 ‘에어 걸(Air Girl)’이라 명명됐다. 이후 선박에서 선실 서비스를 담당하던 ‘스튜어드(Steward)’에서 비롯된 ‘스튜어디스(Stewardess)라는 호칭이 일반화됐다. 다만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 성차별을 없애자는 운동이 일었고 스튜어디스 명칭은 점차 ‘플라이트 어탠던트(Flight Attendant)’라는 용어로 바뀌는 추세다.
 
국내 항공사들도 창립과 동시에 승무원 제도를 도입했다. 대한항공은 1969년, 아시아나항공은 1988년부터 승무원을 뽑았다. 두 항공사 모두 초창기 승무원은 100여명에 불과했지만 현재 대한항공은 6700여명, 아시아나는 3800여명까지 늘었다. 선발 시 키·학력 기준 등은 2015년부터 사라졌다. 대한항공의 경우 토익 550점 이상이고, 교정시력이 1.0 이상인 사람만 지원 가능하다. 현재 대한항공에는 670여명, 아시아나에는 200여명의 남성 승무원이 있다. 전체 인원의 10% 가량에 불과하지만 꾸준히 늘고 있다는 게 항공사의 설명이다.
 
승무원이 되는 길
 
“정민 씨, 카트는 갤리(승무원 전용 공간) 안에서 열고 나와야죠. 다시 해 보세요.”
 
교관의 지적에 빨간 앞치마를 입은 아시아나항공 190기 신입 승무원 이정민(24·여)씨가 황급히 카트를 매만졌다. 승객 역할을 맡은 동료에게 다가간 이씨는 허리를 굽혀 눈을 맞췄다. “식사 준비해드리겠습니다”라는 말에 “비빔밥 주세요”라는 주문이 이어졌다.
 
이씨가 카트를 뒤졌다. 비빔밥은 떨어졌고, 닭고기만 남아 있었다. 긴급 상황이다. 당황한 이씨가 “죄송합니다. 비빔밥이 다 떨어졌습니다”라고 했다. 교관이 다시 교정했다. “단정 짓는 표현은 피해야죠. 다시 한번 해볼까요.” 5초가량 고민하던 이씨는 다시 웃으며 대답했다. “비빔밥은 손님들이 많이 찾으셔서요. 대신 닭고기 요리도 괜찮으십니까?”
 
지난 8일 오후 서울 강서구 아시아나항공 본사 교육훈련동. 보잉 747 비행기의 내부를 그대로 옮겨놓은 ‘747 목업(Mock-Up)룸’에선 지난해 12월 채용된 승무원 20여명이 서비스 교육을 받고 있었다. 12주 3일간 진행된 신입 훈련의 막바지로, 실제 항공기에 탑승하기 직전 진행되는 실전 훈련이다. 평균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이들은 안전훈련, 기내 방송, 외국어 교육, 화장법 등 승무원으로서 소양을 익혀 왔다.
 
하루 뒤인 9일 오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김포 기내식 사업소에서 진행된 대한항공 신입 승무원 교육도 열기가 뜨거웠다. 대한항공은 안전 훈련 1개월, 서비스 훈련 2개월 등 총 3달간 신입 교육을 실시한다. 이날은 인천-나리타 노선에 직접 탑승하는 훈련을 하루 앞두고 기내 모형에서 최종 리허설 중이었다. 파란색 머리띠를 착용한 채 세관신고서 배분 교육을 받고 있던 신입 승무원 이현정(22·여)씨는 “서류전형과 3번의 면접을 거쳐 꿈에 그리던 승무원이 됐다”며 “항상 긍정적인 자세로 임하고 싶다”고 말했다. 비상 착륙 시를 대비해 수영장에서 진행하는 안전 교육 등 3개월 간 고된 훈련을 거쳐야 비로소 대한항공 승무원이 될 수 있다. 그저 식사와 차만 나르는 것이 아니라 불의의 사고로 고객이 피해를 입는 것을 미연에 방지해야 하는 막중한 역할이 승무원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승무원의 고충
 

승무원의 삶이 화려하기만 한 건 아니다. 다양한 고객을 상대해야 하니 감정노동의 강도가 심하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203개 직업에 종사하는 566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항공기 승무원의 감정노동 강도는 5점 만점을 기준으로 무려 4.70점을 기록했다. 모든 직업군 중 1위다. ‘라면상무’ 사건과 함께 최근 팝스타 리처드 막스가 고발한 기내난동 논란 등 승무원이 감당해야 하는 다양한 돌발 상황이 즐비하다. 정부가 관련자에 관한 처벌을 강화키로 했지만 현장 일선에선 큰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들쭉날쭉한 시차에 따른 생체 리듬 변동과 승무원을 향한 왜곡된 폄하 등 일부 부정적인 사회 시선도 부담이다. 한 항공사 승무원은 “객실 승무원의 정년은 보통 60세이지만 그때까지 일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게 사실”이라며 “고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승무원의 모습을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마련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승무원의 기본은 친절이다. 3개월의 신입 승무원 교육이 고객의 눈높이에서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실전 훈련으로 구성되는 이유다.
지난 9일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김포 기내식 사업소에서 대한항공 16-7기
승무원들이 기내 서비스 교육을 받으며 활짝 웃고 있다(사진 위·가운데).
하루 전인 지난 8일 서울 강서구 아시아나항공 본사 교육훈련동에서
아시아나항공 190기 승무원들이 탑승객에게 음료 서비스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사진 아래).
곽경근 선임기자, 윤성호 기자


 
글=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
사진=곽경근 선임기자, 윤성호 기자
그래픽=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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