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내 이름 아시죠



우리에겐 이름이 있습니다. 들풀에도 이름이 있습니다. 학창 시절을 한번 떠올려 봅시다. 새 친구를 사귈 때, “넌 이름이 뭐니? 난 박에스더야”라면서 사귐이 시작됩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짝사랑했던 남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남학생의 이름을 알아내려고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교무실에 들어가 출석부를 훔쳐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알게 된 순간 완전히 다른 느낌의 사랑이 시작됐습니다. 이름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을 알아가게 됩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아는 것입니다. 즉 그 사람과의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관계의 시작은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바탕이 돼야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누구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교도소입니다. 교도소에 갇힌 재소자들은 자신의 이름 대신 수감번호로 불립니다. 왜 그럴까요. 이름은 자신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과 같이 살아온 자신이 들어있습니다.

죄수에게서 정체성을 뺏는 것, 형벌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재소자들의 정체성은 죄수입니다. 죄수는 자신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이름도 가질 수 없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의 징표인 죄수 번호만 가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번호로 부르신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할 말이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번호가 아닌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굳이 왜 그러셨을까요. 본문은 하나님께서 내가 어머니 뱃속에 생기기 전부터 나를 생명책에 기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나의 형질과 형체, 내장을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습니다. 그렇기에 나의 모든 행위와 생각까지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순종하고 원망하고 무시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왜 우리를 창조하셨을까요. 바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반려동물이나 반려식물을 키울 때 무엇부터 하시나요. 아마 이름부터 지을 겁니다. 미키 까망이 몽몽이… 반려동물이 아무 데나 볼일을 볼 때도 이름을 부르면서 화를 내지는 않나요. 왜 그러시나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런데 하나님은 오죽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말 그대로 죽도록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사랑은 죽음을 이기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하고 있나요.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자주 부르고 있나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과의 추억도 따라옵니다. 하나님의 이름 안에는 그분의 성품과 추억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과 어떤 추억이 있으신가요.

이름에는 정체성 믿음 관계 이름의 대상을 향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제 이름 아시죠. 이제 저와 여러분은 사랑으로 묶인 겁니다. 하나님과 여러분도 사랑으로 묶여 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세요. 만약 두려움이 밀려온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세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하나 노려보시다가 벌을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지어 주신 그 이름대로, 심히 기묘하게 지으신 내 모습대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도록 지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내 과거 현재 미래까지 아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계신 그곳에 지금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겁내지 마세요. 낙심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세요. 주여! 아버지! 임마누엘 하나님!

박에스더 목사(ABC교회)

◇ABC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와 적성을 따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공동체로서 신앙의 기본이 되는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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