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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국전의 처음과 끝 함께… 척박한 시대 건너온 가장의 초상

1949년 제1회 국전 최고상인 대통령상 수상 작가로 각인된 류경채 작가는 구상과 추상의 가교 같은 작가로 불린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 명작’전에 나온 ‘가을’(1955, 129.5×96.5㎝)은 50년대 초기 구상 작업 시절의 대표작으로 국전 입선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전 1회 대통령상 수상작인 ‘폐림지 근방’(94×129㎝).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대표적인 추상 시리즈인 ‘날 79-6’(1979, 130×162㎝).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해방 직후 건국의 열기가 뜨겁던 1949년 미술계 최대 이슈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출범이었다. 국전은 정부가 공모를 통해 회화, 조각 등 분야별로 상을 주고 당선작은 전시해주는 제도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주최했던 조선미술전람회(선전)를 벤치마킹했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1회 국전 대통령상의 영예는 경기사범학교(서울교대 전신) 교사였던 29세의 화가 류경채(1920∼1995·아래 사진)의 ‘폐림지(廢林地) 근방’에 돌아갔다. 이후 류경채에게는 ‘1회 국전 대통령상 수상 작가’라는 왕관이 따라붙는다. 영광스러울 수밖에 없는 게 미술인에게는 한동안 국전이 유일한 미술계 등용문이었다. 쌀 80㎏ 한 가마니가 1만원 정도 하던 1971년 대통령상 상금이 100만원일 정도로 상금도 많았지만, 정부가 수상작을 구입도 해줬다. 나중에는 대통령상 수상자 등에게 유럽 여행의 특전도 줬다.

그는 1회 국전을 통해 혜성처럼 등장했을 뿐 아니라 국전이 발전적으로 해체된 1981년(30회)까지 거의 매년 지속적으로 작품을 출품했다. 초대작가와 심사위원도 지내 ‘국전의 보루’라는 평이 따른다.

이건희 컬렉션에는 류경채의 작품도 포함됐다. 50∼60년대 초기의 구상 작품부터 후기의 추상 작품까지 작품세계의 변천을 보여주는 5점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다. 이건희 컬렉션의 구성이 보여주듯 류경채에게는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가교’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국전 1회 대통령상 수상작 ‘폐림지 근방’이 불러일으킨 논란부터 그렇다. 이 작품은 당시 매일 출퇴근하던 사범학교(현 한양대) 인근의, 벌채로 황폐해진 야산을 그린 것이다. 선전에서 유행한 인상주의가 가미된 아카데미즘적인 사실주의 화풍으로 그린 작품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모 심사위원은 “위험한 작품”이라며 반대했다.

“구체적인 자연 이미지에서 출발해 비구상에 도달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 작품은 국전이 구상을 넘어 비구상과 추상을 수용하는 가교가 됐다.

그는 이 작품을 비롯해 50년대까지는 인물이나 동물, 계절 등 자연을 배경으로 한 구상작품을 하지만 단순한 재현을 넘어 표현주의적·상징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조형적인 실험을 했다.

류경채의 작업 세계는 60년대부터 추상화된다. 처음에는 색을 비워내고 지우기도 하고 붓질을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추상표현주의적인 화면을 구사했다. 80년대 전후로는 원 사각형 마름모꼴 형태로 구성된 대칭적인 기하학적 추상 작업으로 발전했다. 특정한 날에 대한 기억을 담은 ‘날’ 시리즈가 대표적인데, 여기에는 구체적인 형상이 없다. 기억을 형상화해 ‘볼 수 있는 시’로 만든 것이라고 미술평론가 김희영 국민대 교수는 평가한다. 이 시리즈도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됐다.

그는 화가 인생 후반부 3분의 2를 추상미술 작가로 살았다. 김복기 경기대 교수는 “전후 추상작가들은 대부분 국전을 거부하며 제도권 밖에서 활동했다”며 “하지만 류경채는 국전 심사위원 등을 하며 국전을 움직인 작가이자 추상미술을 했다는 점이 특별하다”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전에는 50년대에 그린 ‘가을’(1955)이 나온다. 이 작품은 강사를 전전하던 그가 이화여대 정식 교수가 된 그해 신촌 일대의 가을 풍경을 그린 것인데, 국전에 출품해 입선했다. 정면 단풍나무의 붉은색과 남성이 입은 웃옷의 붉은색이 하늘의 가라앉은 청록색과 대조를 이루며 가을의 색채를 한껏 강조한다.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를 사용한 것에 비해 화면에는 쓸쓸한 분위기가 감돈다. 화면 오른쪽의 앳돼 보이는 남성의 얼굴은 창백하고 우수에 젖어 에곤 실레의 작품을 보듯이 시대의 불안이 일렁거린다. 작가는 풍경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재현하기보다는 붓질과 색상에 심정을 의탁했다.

국전 전시 이후 이 작품을 사겠다는 미국인이 신촌의 자택으로 찾아왔지만 팔지 않았던 그림이다. 그게 이건희 컬렉션에 들어간 뒤 국민 품에 안긴 것이다.

80년대 중반 이 작품 등 여러 점을 이건희 회장에게 중개했다는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은 최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당시는 류경채 선생이 추상화를 하던 시절이라 50∼60년대 구상 작품인 ‘구작’은 구하기 어려운 품목이었다. 구상화는 전체 10점 이하에 불과해 가격도 추상화의 10배, 100배 비쌌다. 돈이 있어도 사기 쉽지 않았다”면서 “류 선생이 작품을 잘 팔지 않기로 유명해 구입하려고 꽤 공을 들였다”고 회상했다.

류경채의 며느리 정수현씨는 시아버지를 철저히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류경채는 황해도 해주의 부유하지 않은 집안 출신으로 전남 여수에서 성장했다. 유학파지만 일본에서도 익히 알려진 동경미술학교가 아니라 도쿄로쿠인사화학교(東京綠陰社畵學校)를 졸업했다. 류경채의 야망은 일본 유학으로도 식지 않아서 44년에는 교사직을 그만두고 파리행을 목적으로 베트남 이민을 지원했지만, 좌절됐다. 49년 국전 수상 이후에도 파리 체재비를 벌기 위해 교사직을 그만둔 뒤 초등학교 미술 교과서를 집필했다. 50년대 이화여대에 재직하던 시절에도 단벌이라 겨울에도 여름 양복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당시의 생활고를 이렇게 회고했다.

“53년 서울로 환도한 후 남의 집 2층에 세 들어 살았어요. 가장 가난했던 시절이에요. 그때 목공소를 하는 아내 친구한테 큰 테이블 하나를 얻었는데, 그 위에 유리를 깔고 팔레트로 사용했어요. 방보다 더 큰 테이블 팔레트가 들어간다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받았지요. 테이블 팔레트 위에서 저는 그림을 그렸고 아내는 테이블 밑에 놓인 조리 기구로 살림을 했어요. 그 궁핍했던 시절에 아이 하나를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4회 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60호 그림을 그 위에서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린 작품들이 어쩌다 광에서 나오면 아내는 울먹울먹합니다. 그 시절 가난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것이지요.”

4회 국전에는 ‘신촌 길’과 ‘가을’ 두 점을 출품해 ‘신촌 길’은 무감사 특선, ‘가을’은 입선했다. 당시 7살 큰아들을 모델로 세우고 그렸다는 ‘가을’도 그 테이블 팔레트에 물감을 개서 그렸을 공산이 크다.

그런 어려운 시절을 딛고 류경채는 제도권 작가로 성공했다. 55년부터 86년까지 이화여대와 서울대 미대에서 교수를 지냈고 은퇴 후인 87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에 피선돼 연임까지 했다.

아내 강성희씨는 희곡 작가로 부부가 함께 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세 아들 중 차남 류훈과 삼남 류인 모두 인정받는 조각가가 됐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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