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두상달 (19) 독특한 평신도의 삶… 유혹 많았지만 분수 지키며 살아

두상달 장로가 1980년대 ‘직장인 초청의 밤’ 행사에서 인사하고 있다.


잔디를 덮고 누워 있어야 할 나이인데도 아직 건강해 잔디를 밟고 다닌다. 엄청난 축복이다. 건강의 비결은 어렵게 살았던 어린 시절 때문이다. 중학교 때 통학 거리는 무려 10㎞에 달했다. 자전거 한 대 살 돈이 없어 그 먼 길을 도보로 통학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걸었다. 당시는 고난의 길이었지만 돌아보니 축복의 시간이었다. 건강의 기초를 다지고 다리의 힘을 기르는 시간이었다.

고2 때 교장 선생님께서 당신의 중3 아들의 공부를 봐주라며 입주 과외를 제안했다. 신나는 희소식이었다. 1년 동안 교장 선생님 댁에 머물며 편안하게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때 1년 만에 키가 15㎝나 자랐다. 잘 먹고 편안했던 모양이었다. 고3 때 180㎝를 넘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큰 사람이 많지 않았다. 시대상에만 비춰보면 장애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 와서는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시골 깡촌 출신에 키는 크지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고립무원이었다. 황량한 광야에 던져진 존재라는 생각에 움츠러들고 허리는 굽고 자신감은 사라졌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 예수를 믿고 보니 내가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사명감을 느끼게 되니 나도 모르게 열등감은 사라지고 자존감은 높아졌다.

자존감을 느끼게 되니 성격도 적극적이고 생산적이며 도전적으로 바뀌었다. 고등학교 때 반 대표를 했지만 여러 사람 앞에 서면 얼굴이 붉어졌다. 가슴도 두근거려 제대로 말도 못 했다.

그런데 많은 단체를 섬기다 보니 대중 앞에 설 기회가 많아졌다. 지금은 사람이 많을수록 신바람이 난다. 생방송을 해도 여유가 생겼고 편안하다. 아내와 가끔 “우리 참 독특한 삶을 살았지”라고 대화한다. 사업을 하면서도 사업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냈다. 그것만이 아니다. 수많은 선교단체를 섬겼다.

청소년을 비롯한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심는 운동을 했다. 부부가 강의와 상담도 수없이 했다. 방송에도 많이 출연했다. 글도 쓰고 책도 발간했다. 지금도 6년 동안 한 신문에 매주 고정 칼럼을 쓰고 있다. 정말 독특한 평신도의 삶을 살았다.

물론 긴 세월을 살면서 진로가 바뀔 뻔했던 기회가 많았다. 교수가 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신학교에 가라는 권유도 많이 받았다. 정치권에서도 유혹했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평생 정당에 가입하지 않기로 하고 담을 쌓았다. 내 분수를 알고 내가 하는 일에서 큰 보람을 느꼈기 때문에 다른 쪽은 포기하기로 했다.

때론 권력과 명예를 가진 사람이 다른 것까지 챙기려니 사달이 나는 경우를 많이 봤다.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반세기 동안 사업을 하면서 유혹과 올무도 많았다. 99섬 가진 자가 한 섬 가진 자의 것을 탐내는 게 나의 욕심이다. 사무실에 있으면 별별 사람이 다 찾아온다. 각종 특허에 별별 신기한 아이템을 들고 온다. 재정 문제로 날 찾거나 그럴듯한 사업 계획서도 가지고 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절제한다.

이유는 하나다. 나는 일터로 파송 받은 그리스도의 대사여서다. 내가 잘못되면 예수님이 욕먹기 때문이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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