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합리적 근대인의 탄생



어떤 사람을 설명하는지 함께 생각해보면 좋겠다. 조선 후기 가난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먼 친척의 양자로 들어갔다. 25세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후 조정에 발탁돼 고종과 민비를 모셨다. 갑신정변이 일어나 왕이 위태로웠을 때, 왕을 보호하고 갑신정변 연루자를 뿌리 뽑는 데 앞장서 더욱 왕의 총애를 입었다.

일찍부터 미국이 세계를 주도할 것으로 생각해 영어를 배웠고, 미국 공사의 수행원으로 미국에 파송 받았으며, 대미외교의 일인자가 됐다. 을미사변 후 독립협회가 조직됐는데 그는 창립총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상당한 재산을 독립문 건설을 위해 헌금했다. ‘독립문’의 휘호를 쓸 정도로 당대의 명필이었다.

과연 이 사람은 누구일까. 놀랍게도 그는 이완용(李完用·1858~1926)이다. 1905년 대한제국의 학무대신으로서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해 외교권을 일본에 넘겨주는 데 앞장섰다. 이후 총리대신으로서 1910년 한일합방을 성사시킨, 매국노의 대명사 바로 그 이완용이다. 합방 후 그는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끝까지 친일부역에 앞장섰다.

이완용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개인적 탐욕을 위해 나라를 팔아넘긴 희대의 괴물이 아니다. ‘이완용 평전’을 쓴 김윤희 박사의 평가에 따르면 한마디로 그는 “합리적 근대인”이었다. 주어진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에 순응하여 최상의 실리적 선택을 하는 사람이었다. 미국이 강대국이니 미국으로부터 배우고, 러일전쟁 후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게 될 것이 분명해지자 일본의 편에 섰다. ‘유능한’ 관리로서 왕실에 대한 의리를 지키면서 어차피 무너질 조선을 위하여 나름 최상의(?) 선택을 했다. 물론 이렇게 할 때 자신에게 주어질 약간의(?) 이익을 챙기는 것을 빼먹지 않았다.

“합리적 근대인”을 요즘 말로 풀어 쓰면, ‘주어진 기회를 활용할 줄 아는 유능한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일 것이다. 기술관료의 상층에는 21세기 대한민국 국민이 욕하면서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다. 행정부 고위 관료, 최고위 선출직 정치인, 대기업 임원, 창업·투자 기획자, 플랫폼 기업 소프트웨어 개발자, 잘나가는 의사·법률가·언론인·교수와 같은 전문직 등이다. 모두 교육을 많이 받은 유능한 인재들이며, 자기의 분야에서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일생에 몇 번 찾아온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아서 상당한 부동산을 가지고 있다.

상층에 자리 잡은 사람들만 합리적 근대인은 아니다. 최상층 사람들이 만든 카르텔(∼피아)이 하도 공고해서 진입하지 못할 뿐, 모든 사람은 각자 속한 조직에서 동일한 유능함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조직을 넘어설 능력도 용기도 영혼도 없다. 합리적 소비와 합리적 투자로 자산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안타깝게도 번번이 상투를 잡을 뿐이다.

합리적 근대인이 만든 세상은 합리적인 것 같지만 비합리적 욕심에 이끌리고, 역동적인 것 같지만 지루하고, 승리가 손에 닿을 듯하지만 모두가 패배자이며,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것 같지만 겉보기만 그럴 뿐이다. 바로 우리가 사는 일명 ‘헬조선’이다. 진리에 대한 열정, 가치와 윤리에 손을 놓고, 안정과 실용성을 택한 사회의 운명이다.

근대적 합리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길이 있을까. 늙은 이완용이 만들어놓은 현실을 살며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해야 했던 젊은 윤동주, 그는 ‘참회록’에서 현실을 비껴갈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의 고백을 남겼다. 새파란 동록(銅綠)이 낀 자신을 밤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참회하면서 말이다. 슬픔과 참회, 모든 변화의 시작이다.

111년을 맞는 국치일을 그냥 보낼 수 없어서 몇 자 적어보았다.

장동민 백석대 교수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