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두상달 (11) 한국 기독교 전체가 이뤄낸 큰 역사 ‘엑스플로74’

1974년 ‘엑스플로74’가 열린 서울 여의도광장에 마련된 텐트촌 전경.


‘엑스플로74’는 한국 교계 전체가 참여해 이뤄낸 큰 역사였다. 한경직 목사님이 대회장이셨고, 김준곤 목사님은 준비위원장을 맡으셨다. 당시 교계 지도자들도 모두 참여했다. 이들 모두 대회의 주역이었다.

무려 30만명이 모이는 집회였다. 행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초대형 행사를 준비하는 건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다.

우선 여의도광장에 8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텐트를 쳤다. 이걸로 부족해 영등포구와 마포구 용산구 서대문구에 있는 학교까지 빌려 숙소로 사용했다. 행사는 1974년 8월 13일부터 엿새 동안 진행됐다. 낮에는 숙소에서 사영리 전도훈련을 했고 오후에는 여의도광장에 모여 철야 기도회를 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막상 행사가 시작하자 숙소를 옮겨달라는 민원이 줄을 이었다. 권력 기관까지 앞세운 청탁도 있었다. 마침 내가 숙소를 담당하며 진행도 돕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모든 부탁을 무시했다. 한 명의 편의를 봐주기 시작하면 이미 배정해 놓은 모든 숙소와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배식도 문제였다. 이형자 권사를 통해 많은 양의 ‘콘티빵’을 기증받았다. 이를 각 학교로 배달했는데 기사들이 상자째 이리저리 팔아버리면서 참석자들이 쫄쫄 굶게 된 것이었다. 시시비비를 따질 새가 없었다. 배달사고를 막으려고 둘째 날부터 고등학생 CCC 회원을 배식 트럭에 태운 뒤 기사들이 행선지를 바꾸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밥도 한 곳에서 지어 숙소로 날랐다. 반찬은 새우젓과 단무지가 전부였다. 허름한 반찬이 기가 막혀 “짠 걸 먹어야 복음을 토해 낼 수 있다”는 농담도 했다.

8월 15일 아침이 밝았다. 이날은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하지만 이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했던 육영수 여사께서 문세광이 쏜 총탄에 세상을 떠났다. 겨우 48세였다. 불우이웃을 도왔고 청와대 안의 제1야당이라 불릴 만큼 박정희 대통령에게 민심을 직언했던 육 여사였다. 온 국민이 슬픔에 빠졌다.

장대비가 쏟아졌다. 영부인을 잃었다는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여의도광장 텐트촌을 담당하는 총순장들이 나한테 달려와 울면서 호소했다. 텐트촌에 물이 들어찬 것이었다. “텐트촌이 물바다가 돼 텐트가 물에 뜹니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사람의 힘으로 할 일이 없었다.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회사에서 관리를 경험했기 때문에 행사 진행에 자신이 있었다. 자만이었다. 너무 괴로워 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인간의 계획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밤이 되면 기도회가 시작됐다. 장대비가 쏟아진 15일 밤에도 100만명이 넘는 참석자들이 빗속에 무릎을 꿇고 이중 10만여명이 철야기도를 했다. 빗소리와 뒤섞인 기도 소리는 장엄한 느낌을 줬다.

엑스플로74에 참석했던 외국인들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스플렌디드(splendid)’라고 했다. 훌륭하다는 찬사였다. 이들은 “이토록 간절히 기도하는 민족을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하신다”고 입을 모았다. 나사렛 형제들과 여러 간사, 회원들이 눈물을 흘리며 온몸을 바쳐 진행한 행사였다. 눈물의 씨앗은 전도 폭발로 이어졌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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