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두상달 (9) 한국 CCC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한 민족복음화운동

두상달 장로가 지난 16일 경기도 양평 자택에서 ‘민족 복음화의 환상과 기도’라는 제목의 김준곤 목사의 기도문을 앞에 두고 CCC 운동의 여정을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1971년 정동에 한국CCC 회관 건물이 마련된 뒤 민족 복음화 운동은 빠르게 확산됐다. 외부 골조만 세워진 미완공 상태일 때부터 전국에서 핵심 요원이 1000명 단위로 참여해 전도 요원 훈련을 했다.

나사렛 형제들의 헌신이 큰 역할을 했다. 매년 여름에는 전국대회를 열었고 겨울에는 원단 금식기도회를 진행했다. 이 기도회는 매년 12월 31일에 모여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계획하는 자리였다. 가장 많을 때는 수만명에 달했던 나사렛 형제들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긴 세월 헌신한 복음의 행동대원들이었다.

71년은 CCC 역사에 있어 여러모로 큰 의미가 있었다. CBS 방송을 통해 김준곤 목사님이 ‘민족 복음화 운동’의 큰 비전을 선포하셨던 일도 있었다. 제야의 종소리 타종 직후 선포된 메시지였다.

우리에게는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꿈을 심어주셨다. 이 말씀이 결국 젊은이들의 마음을 복음으로 불타게 만들었다. 그해 8월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열린 대규모 학생 전도 훈련이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렸다.

민족 복음화 운동에 소명을 받은 요원들과 젊은이 1만여명이 모여 훈련을 받았다. 숙소는 체육관 인근 6개 초등학교 교실이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겠지만 책상과 걸상을 치우고 교실 바닥에서 잤다. 오전에는 학교에서, 점심을 먹은 뒤에는 체육관으로 이동해 집회했다.

나는 한 초등학교에 모인 이들을 책임지는 총순장으로 봉사했다. 1000여명을 인솔하고 학교에 갔다. 그런데 시설이 너무 낙후했다.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가 화단 옆에 하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이 씻어야 하는데 너무 황당했다.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온 동네를 다니며 드럼통을 여러 개 산 뒤 종일 물을 받았다.

물은 확보했지만, 배수가 문제였다. 물이 화단으로 넘쳐 교장이 가꾼 꽃밭이 망가져 버렸다. 교장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예의를 다해 사과드린 뒤 싹싹 빌었다.

식사를 해결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지금 같으면 도시락을 주문해 나눠줬겠지만, 당시는 플라스틱 용기를 구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마침 대전에 부도가 난 대형 밥솥 공장이 있어 그걸 사다 야외에 걸었다. 여기에서 밥을 해 간단한 반찬과 함께 각 학교로 배달했다.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열정만 가지고 대형 행사를 치른 셈이었다.

이 경험은 이후 더 큰 집회를 준비하는 자양분이 됐다. 같은 해 진행한 춘천성시화 운동과 74년 ‘엑스플로74’, 80년 비상구국 금식 운동과 세계 복음화대회, 84년 기도성회까지 CCC 회원들은 민족 복음화를 위한 일에 앞장섰다. 이 일을 성공적으로 준비하고 진행하기 위해 나사렛 형제들은 언제나 헌신했다. 형제들은 자신의 삶과 젊음을 바쳐 CCC를 사랑했다. 이들을 생각하면 늘 눈물겹도록 고맙고 또 그립다. 물론 CCC 간사들도 같은 수고를 했다. 모두의 노력이 모여 복음이 조금씩 확산했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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