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장식 (25) 비기독교 학생들, 교정에 위패 놓고 돼지 삶아 절까지

한신대가 1986년 5월 27일 경기캠퍼스 교정에 세운 류동운 열사 추모비. 한신대 신학과 79학번인 류 열사는 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참가했다 희생 당했다. 한신대 제공


서울에 올라온 우리 가족은 한강변에 있는 한강 맨션에 입주했다. 아파트를 살 만한 돈이 없었으나 나이 50이 넘어 전셋집에서 살 수 없다는 장모님의 주장에 따라 장인의 도움과 은행 빚을 얻어 집을 구입했다.

내가 대구 계명대에 있는 동안 한신대에서는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가 열렬했다. 학교가 무기 휴학 조치를 받은 일도 있었고, 김정준 학장을 비롯한 교수들이 항의 표시로 삭발을 했으며 김 학장은 교기를 칼로 찢기도 했다. 일부 학생들은 경찰에 끌려가서 구금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내세운 유신체제는 많은 부작용을 빚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통치 권력 인수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건들로 나라를 어지럽혔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군사정권의 폭정에 대한 광주시민의 항거였는데, 군부의 시민 학살은 한국의 군사정권 사상 가장 큰 과오였다.

이때 한신대 신학생 한 명이 희생됐고, 전교생이 그를 애도했다. 나 역시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아내는 1년간 영국 유학 중이라 이 소식을 영국에서 들었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아내도 애도의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련해 기독교 선교를 위해 세운 학교에서 있어선 안 될 일이 일어났다. 비기독교 학생들이 희생된 학우를 추모하기 위해 교정에 위패를 만들고 돼지를 잡아 술잔을 두르며 절을 하는 게 아닌가. 기독교 대학에선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이 미신행위를 대학 당국자는 관용하고 있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비참함을 전 국민이 규탄하던 이때, 비기독교인 학생들의 그 행위를 미신이라고 해서 못하게 할 만한 용감한 신학생이나 기독교인 교수나 학장이 있었더라면 도리어 친정부 부류라고 미움을 샀을지도 모른다.

한 신학생이 정의를 위해 희생된 건 사실이지만 그가 신주로서 제물을 받고 절을 받는다면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 어긋나는 것이다. 혼란시대에는 혼돈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럴 때도 ‘예’와 ‘아니요’를 구별할 수 있는 식견이 선생이나 지도자에겐 있어야 한다.

81년 한신대는 기존의 대학원 외에 신학대학원을 문교부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난 이 신학대학원 초대 원장이 됐다. 이 무렵 나는 그동안 쓴 논문들을 엮어서 ‘평신도는 누구인가’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런데 이 책이 문공부 검열에 걸렸다.

화근이 된 논문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기독교사상에 발표한 것이었다. 중국의 모택동이나 북한의 김일성이나 남한의 박 대통령이 형식은 서로 달라도 독재임에는 다 같다고 쓴 게 걸림돌이 됐다. 이 책은 노태우 정권 들어 해빙시대에 접어들면서 검열에서 풀렸다.

아내가 영국에서 귀국하자마자 우리는 살고 있던 아파트를 세놓고 세검정에 있는 2층 주택으로 이사했다. 아내는 곧바로 안양의 대신대에서 학생들에게 유아교육을 가르치게 됐다. 아내의 교계 활동도 활발해졌는데 한국여신학자협의회 부회장으로, 서울 YWCA 교육위원으로, 그리고 기장 여신도회 서울연합 회장으로 활동했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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