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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소리] 사이다·고구마, 그리고 괴물



얼마 전 종편에서 방영된 ‘빈센조’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어린 시절 한국에서 이탈리아로 입양된 ‘마피아 출신 변호사’가 한국에 와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이야기이다. 그의 목적은 숨겨뒀던 금을 찾는 것이었지만 드라마의 뼈대는 금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직면한 거대한 악과의 싸움이다. 빈센조는 자신의 특화된 마피아적 기술로 매우 구조적으로 연결된 악의 고리를 부수며 목적을 이룬다. 드라마 속에서 ‘마피아’는 악을 응징하기 위한 매우 신선한 도피처가 됐다. 마피아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에 기대서 상상 초월한 모든 행동들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빈센조’뿐 아니라 근래 들어 많은 드라마의 주제들이 ‘복수’라는 흐름 속에 있는 듯하다. 그런데 복수를 주제로 한 이러한 드라마들의 공통점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개인’에 맞춰져 있다. 불이익과 불의를 경험한 사람들이 문제를 공식화시키고 법적으로 해결하기 이전에 개인적인 응징이나 보복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개인적 응징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뤄짐으로써 보는 사람의 답답함을 풀어주고 소시민들의 판타지 영웅을 만들기도 한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었으면’ 혹은 ‘나에게도 저런 사람이 있었으면’하는 감정이입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 복수가 주류를 이루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그들은 왜 법이나 공권력의 도움을 받지 않고, 개인적인 복수를 택했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빈센조’의 마지막 장면은 이에 대한 답을 준다. 매우 폭력적인 장면들 뒤에 빈센조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난 여전히 악당이며 정의 따윈 관심조차 없다. 정의는 나약하고 공허하다. 이걸로는 그 어떤 악당도 이길 수 없다. 만약에 무자비한 정의가 세상에 존재한다면 기꺼이 져 줄 용의가 있다.”

빈센조라는 악당을 만들어낸 배경은 정의가 작동하지 않는 세상이다. 정의가 실현될 수 없는 상황이 증폭될수록 ‘사이다’의 맛은 강해지지만 불의와 적폐로 둘러싸인 현실이 주는 ‘고구마’ 같은 답답함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이 단순히 고구마 정도로 끝나지 않는 것은 개인적 복수가 피해자를 어느새 가해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해자가 된 그 피해자는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 이상으로 ‘괴물’이 되어 버린다. 어쩌면 드라마는 바로 이것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우리를 둘러싼, 드라마뿐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서 언제든지 마주할 수 있는 ‘괴물’에 대해서 말이다. 그래서 빈센조의 마지막 말은 마치 일종의 경고 같다. “악은 견고하며 광활하다.”

그렇다. ‘악’은 흔들리지 않고 평범하며 일상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악의 이 평범성과 일상성 때문에 악의 고리를 끊는 것이 쉽지 않다. 악을 분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또한 스스로 악에서 벗어나는 것도 물론이다. 아마도 ‘내로남불’이라는 그 유명한 말도 악의 이 속성과 무관하지 않다. 내로남불은 괴물이 되어가는 첫걸음이다. 그렇다면 흔들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뿌리 내린 이 악을 벗어나는 진정한 방법은 없을까. 진부하더라도 이즈음 귀 기울일 것은 다시금 바울이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벗어나기도 힘들고 끊을 수도 없는 악의 굴레에서 다른 사람이 사는 대로 사는 것은 생명을 보장하지 못한다. 내로남불은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선과 정의를 기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의 마음을 내가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선을 행하는 것은 가능하다. 나는 의지를 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말이다. 그러면 분명 ‘무자비한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볼 것이다. 적어도 ‘괴물’은 되지 않을 것이다.

김호경 서울장로회신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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