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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에서 ‘Korea’가 사라졌다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28일(현지시간) 취임 후 첫 상·하원 합동 연설을 하고 있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뒤로 카멀라 해리스(왼쪽) 부통령과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앉아서 박수를 치고 있다. 부통령과 하원의장 자리가 배치되는 미 대통령 연단 뒤 두 자리를 모두 여성이 채운 것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일이다. 바이든 대통령도 “‘마담’ 하원의장 그리고 ‘마담’ 부통령. 이 연단에서 어떤 대통령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가 됐습니다”라면서 역사적 순간을 기렸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월28일(현지시간) 미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열린 보수정치행동회의(CPAC)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트럼프는 "민주당의 대선 사기로 선거를 훔쳤다"라고 주장하며 "그들을 패배시키기 위해 세 번째 결심을 할 수도 있다"라며 차기 대선 출마 가능성을 시사했다. AP뉴시스




워싱턴에서 ‘코리아(Korea)’가 사라졌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 한반도에 집중됐던 미국 조야(朝野)의 관심이 정권 교체 이후 급속히 쪼그라든 모습이다. 취임 직후부터 북한 문제를 행정부 차원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던 트럼프 전 대통령과 달리 조 바이든 대통령은 한반도 현안 자체를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한반도 문제가 바이든 행정부의 핵심 의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는 것이다.

물론 북한의 태도가 크게 달라졌다. 4년 전 북한은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등 미국에 위협적인 전략적 도발을 거듭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미국의 ‘대(對) 중국 정책 변화’가 보다 근본적인 이유라고 분석했다. 정권 교체 후 미·중 경쟁이 더욱 심화하면서 북한보다 중국에 관심이 쏠린 측면이 크다는 것이다. 코로나19 극복과 경기부양 등 시급히 해결해야 할 내부적 과제도 산적해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미국 주도의 대중국 견제 동맹 참여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내놓는다. 미·중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데 전념하고 있는 바이든 행정부 입장에서 한반도 이슈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한·미동맹이 한·미·일 안보협력의 종속 변수로 다뤄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고개를 드는 이유다.

국민일보가 29일 미국 대통령의 공개 발언 데이터베이스 사이트인 팩트베이스를 분석한 결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임기 첫 100일 동안 북한(North Korea)을 포함해 한국(Korea)을 언급한 것은 총 74회로 집계됐다. 반면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후 최근까지 내놓은 한국 관련 발언은 28일(현지시간) 기준 다섯 차례다.

코리아를 언급한 날 수를 보면 한반도에 대한 전현직 미국 대통령의 관심도 차이가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취임 후 첫 100일 동안 코리아를 언급한 날은 총 26일이었다. 나흘에 한 번 입에 올린 셈이다. 이에 반해 바이든 대통령은 100일 중 닷새에 불과했다.

바이든 대통령 입에서 코리아란 단어가 처음 등장한 건 지난 2월 4일 국무부 연설 때다. 당시 바이든 대통령은 동맹국 정상과의 전화통화를 언급하면서 한국이란 단어를 한 번 사용했다. 이후 등장한 건 지난 23일 폐막한 기후정상회의 때다.

북한에 대한 언급은 3번에 불과했다. 러시아에 대한 새로운 제재 발표(지난 15일)와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와의 공동 기자회견(지난 16일), 이날 있었던 첫 상·하원 합동연설이 전부다. 반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취임 첫 100일간 북한을 69회 언급했다.

내용 측면에서도 온도 차가 상당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북한을 콕 집어 행정부 차원의 선결 과제로 규정하는 취지의 발언이 많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반대로 북한을 직접 거론하기보다는 중국과 이란 등 미국의 가상적국과 함께 언급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미국과 세계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이란과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대해 우리는 동맹국들과 긴밀히 협력해 외교와 엄격한 억지를 통해 대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연설에서 코리아가 등장한 건 이때 딱 한 번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북한 관련 발언을 애써 삼가려는 눈치도 엿보인다. 지난달 21일 북한이 단거리 순항미사일을 발사한 직후 기자가 관련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주어를 생략한 채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만 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일종의 개인적인 호감을 드러내 왔다. 반면 바이든 대통령은 북한 지도부와 관련해 최대한 관심을 주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다. 다소 즉흥적이고 다변가인 트럼프 전 대통령과 달리 말수가 적은 바이든 대통령의 스타일 차이도 있다.

전현직 정상의 인식 차이는 두 행정부 관료에게서도 나타난다. 전현직 행정부 모두 북한 핵을 '심각한 위협'으로 규정했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 백악관과 국무부 관리들은 북한 정권을 "용납할 수 없고 변덕스러우며 불법 행위를 일삼는다"고 비난하는 등 수위가 높았다. 반면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언급은 "도전적인 이슈" "우려스럽다" 등 절제된 표현 위주였다.

우선순위가 달라졌다

바이든 대통령의 외교 방향은 다자주의 복귀다. 북한 문제 역시 직접적 언급을 최대한 삼가며 동맹 공조를 강조하는 분위기다. 북핵 문제를 직접 해결해 자신의 치적으로 삼으려 했던 트럼프 전 대통령의 정책 외형과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더욱 근원적인 문제는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인식이 바이든 행정부 들어 보다 심화한 데 있다.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의견은 두 행정부 모두 같지만 전현직 대통령의 발언이나 대응방식을 보면 미묘한 차이가 드러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이 직접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발언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의 발언에선 북한 문제를 지렛대 삼아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의도도 읽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환율조작국 지정 문제를 거론하며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중국의 협조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은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과 협력하겠다"는 의례적인 언급만 해왔다. 철저히 미·중 전략적 경쟁 구도에 집중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유럽의 나토가 분쟁을 막기 위해 있는 것처럼 인도·태평양 지역에서도 (미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겠다"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말한 사실을 공개했다. 그는 "나는 경쟁을 환영하지 갈등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미국의 이익을 옹호할 것임을 (시 주석에게) 분명히 했다"며 "미국은 국영 기업에 대한 보조금, 기술 및 지식 재산의 도난과 같이 미국 노동자와 산업을 약화시키는 불공정 무역 관행에 맞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에 대한 강력한 견제 의지를 공식 피력한 것이다.

뒷전으로 밀린 한반도 이슈

데이비드 달러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선임 연구위원은 "바이든 행정부 첫 100일 동안 보여준 대중 정책은 트럼프 행정부와 비슷하다. 대치, 경쟁, 협력이라는 노선 중 경쟁과 대치 쪽으로 기울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뉘앙스 차이가 있다"며 "그것은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에 맞서기 위해 동맹국과의 파트너십 재건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중 견제와 이를 위한 파트너십 강화가 미국 대외정책의 주요 방향으로 설정됐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정책 방향이 한반도 안보 이슈에 직접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했다.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중국에 대한 시선 자체가 달라지면서 대북 정책에 대한 시각도 양 행정부가 뒤바뀌게 됐다. 미국의 대북 정책 방향이 '스몰딜'(부분적 합의) 형태가 될 거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중국 때리기에 우선 에너지를 쏟고 북한은 관리만 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변방 국가로 밀려 있다"며 "바이든 정부에서 한국은 한·미·일 3국 공조라는 측면에서만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고 지적했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북한이 2017년 핵과 미사일로 도발하면서 트럼프 전 대통령으로서는 이를 현안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의 경우 코로나19 극복과 경기회복, 중국 대응 등이 메인 현안이 되면서 한반도 이슈는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 센터장은 특히 "일본이 중국 문제에 협력하면서 미·일 관계가 좋아졌지만 문재인정부는 이 문제에 협력적이지 않다"며 "시급성을 보면 바이든 행정부 핵심 의제 리스트에서 '코리아'는 덜 언급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강준영 한국외대 교수는 "북핵 문제가 우선순위에서 밀린 데다 문재인정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는 "중국 문제가 미국의 아시아 정책을 구상하는 큰 줄기가 되면서 나머지는 하위개념으로 전락했다. 미국은 이런 대외정책을 위해 흐트러진 경제·사회적 혼란을 먼저 수습하려고 한다"며 "쿼드나 인도·태평양 전략 참여, 반도체 정책이나 5세대(G) 협력 등 미국이 관심을 두고 있는 사안에 대한 유인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각수 전 주일본 대사도 "한국은 제재 해제를 우선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은 그럴 가능성이 작다. 이런 인식 차이를 줄이지 못한 상황에서 한·미 정상이 만나면 엇박자가 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전웅빈 조성은 황윤태 기자 im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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