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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시론] “박애는 누가 키우나?”



“소는 누가 키우나?” 한때 어느 개그 프로그램에서 유행했던 말이다. 이후 사회 저명인사들이 ‘꼭 해야만 할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질문용으로 패러디해 다시금 유행했다. 요즘 세태를 지켜보면서 “박애는 누가 키우나?”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여러 특징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극단적 사회’를 들 수 있다. 극단적 상황, 극단적 상황 인식, 극단적 의견 표출 등으로 날이 새고 날이 저문다. 그렇다면 극단적 사회가 돼버린 한국 사회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를 위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일까?

근현대사회를 연 이정표적 사건인 프랑스혁명은 인간사회의 필수적 가치로 세 가지를 손꼽았다. 곧 자유, 평등, 박애(우애 혹은 형제자매애)다. 이 가운데 자유와 평등은 비교적 자명하고 보편적으로 인정된 개념으로 정치체제로까지 발전했다. 바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다. 자유와 평등은 인권(권리)으로 인식됐고, 이것을 추구하는 파란만장한 헌신의 역사가 있었다. “그런데 박애는 누가 키웠나? 그리고 지금 누가 키우나?”

역사적으로 돌아보면 세 가지 개념 가운데 박애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지면상 상세한 이유를 밝힐 수는 없고, 박애가 정치체제로 발전하지도 못했고 그것을 추구하는 흐름도 미약했다는 정도만 언급해두자. 그렇다면 박애는 필요 없는 군더더기나 잘못 끼어든 천덕꾸러기인가? 아니 박애는 인권(권리)보다는 대의명분(의무)으로 여겨져 매력이 없는 주제인가?

박애는 나름의 고유한 기능이 있다. 박애가 없으면 자유도 평등도 제대로 구현되지 않고, 자칫 자유와 평등이 이분법적 대립 개념으로 비친다. 다행인 것은 박애에 대해 주목하고 재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지속됐다는 사실이다. 신학자 볼프강 후버는 박애를 참여로 대체하면서 자유, 평등, 참여를 상호 관계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사회복지학자 이만식은 자유와 평등은 정의에 기초해서 볼 때 대립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20세기 말부터 연대, 화해, 평화 등의 개념이 핵심적 신학 개념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박애가 참여든 정의든 연대든 화해든 평화든 어떤 식으로 해석되더라도, 박애는 자유와 평등을 잇는 개념으로 꼭 필요하고, 그래야 자유도 평등도 제구실을 할 수 있다. 자유와 평등의 추구가 권리 주장의 살벌한 각축장을 연상시킨다면, 여기에 박애를 더할 때 인간성 회복의 훈훈한 인간극장을 떠올리게 된다.

앞으로도 인권의 양극단이라 할 수 있는 자유와 평등은 강조되고, 이를 위한 대변자와 헌신자들이 이어질 것이다. 교회도 세상 안에 존재하는 한 이런저런 모양으로 자유와 평등에 관여할 것이다. 물론 그럴 경우 교회가 세련된 정치 감각과 신뢰받을 수 있는 공공의식을 갖춰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박애를 강조하고, 박애를 위한 대변자와 헌신자가 이어질 가능성은 여전히 낮다. 더구나 박애가 정치권의 우선적 관심이나 과제가 될 가능성은 더욱 낮다.

“그렇다면 박애는 누가 키우나?” 박애는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의 본령이다. 왜냐하면 박애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고, 더구나 인류애라는 숭고한 사랑은 거저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애는 자유와 평등에 비해 블루오션 곧 미개발된 유망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에 가장 걸맞고 종교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교회가 박애에 나선다고 말릴 사람도 욕할 사람도 없다. 교회는 이제라도 꼭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하자. 그것이 극단적 사회 속에서 하루하루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우리 시민을 섬기는 우선적 과제가 될 것이다.

안교성(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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