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신실한 일꾼이 뿌린 믿음의 씨앗, 도처에 나무로 우뚝

경기도 양평군 상심리교회 느티나무홀. 이 교회의 다섯 번째 예배당으로 1985년 입당했다. 이곳에서 100m 지점에 새 예배당이 있다. 남한강 하류 나루터 인근에 있던 초기 예배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피해를 보고 느티나무홀 자리로 옮겼다. 붉은 종탑은 홍금산 집사 등이 치던 새벽종이다. 아래 사진은 강 남쪽에서 본 상심리 풍경으로 정중앙 붉은 벽돌 건물이 교회 본당이다.



 
홍금산 집사 (1904~1974)
 
홍금산·신선자 부부. 1950년대 말로 추정된다.
 
홍금산 집사의 딸 옥희(왼쪽)·은분 권사. 아기는 손녀.



 
상심리교회 대예배 모습. 코로나19 이전 자료 사진.


거시적 역사의 구조보다 한 개인의 삶이나 소집단의 삶을 탐색하는 역사연구의 방법론을 미시사라고 한다. 이 개인의 삶이 묶이면 역사의 도도한 강줄기가 된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경기도 양평 양수리 인근 상심리교회에 홍금산(1904~1974) 집사가 있었다. 제1차 한일협약 조인으로 나라가 사실상 망국으로 치닫는 해에 태어난 생명이었다. 이 보잘것없는 생명은 그저 필부로 살다 한 줌 흙으로 돌아갈 그럴 운명이었을 것이다. 조선 백성 대개가 이 사내와 같았다.

홍금산이 두 살 되던 해 러일전쟁이 발발했고, 이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고문정치란 핑계로 조선을 식민지화했다. 그렇다고 홍금산의 삶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데 그해 상심리 출신 차상진(1875~?·독립운동가)이란 소작농이 대처에 드나들며 예수를 믿게 됐다. 그는 상심리교회(1905년) 설립을 주도했으며 훗날 목사가 됐다.

홍금산은 할머니 손에 이끌려 상심리 예배당에 다녔다. 그 할머니가 곱게 차려입고 예배당으로 향하면 붉은 옷을 입은 박수가 길을 막았다. 할머니는 그때마다 “썩 물러가라”며 담대했다. 어린 금산은 할머니의 치마폭에서 말씀을 귀담아들었다.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는 무엇하리요/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도/ 우리 한 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홍안소년 미인들 자랑치 말고/ 영웅호걸 열사들 뽐내지 마라/ 유수 같은 세월은 널 독촉하고/ 저 적막한 공동묘지 널 기다린다…모든 육체 풀같이 썩어버리고/ 그의 영광 꽃같이 쇠잔하리라/ 모든 학문 지식도 그러하리니/ 인간일생 경영이 바람잡이뿐….’

할머니는 ‘허사가’를 늘 흥얼거렸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전도서’에 바탕을 둔 노래였다. 요즘으로 치자면 복음성가다. 농사꾼으로 성장한 홍금산은 1921년 세례를 받았다. 그가 아는 세상 소식은 태백산맥 물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뗏목의 떼꾼과 나무를 내다 파는 경성 인근 뚝섬시장 나무꾼들로부터 들은 것이었다. 상심리나루터에는 색주가도 있었다. 하지만 말씀보다 단 것은 없었다.

그렇게 수염이 거뭇해진 홍금산은 상심리교회 신앙 좋은 처녀 신선자(1908~1963)와 결혼도 했다. 그리고 부부는 오직 전도만이 하나님을 영광 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디를 가나 ‘허사가’를 목청 높이 부르며 죄의 고백 없이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천국에 이르지 못한다고 전했다. 일장춘몽의 삶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로 받아들일 것을 권했다.

그는 싸리빗자루와 억새바구니 등을 만들어 양평과 양주, 멀리 홍천과 뚝섬 등에 내다 팔았다. 2남 4녀가 태어났다. 그런데도 단 한 번도 식량 걱정을 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먹이고 입혀 주실 것을 믿었다.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잠 6:6)는 가르침에 따라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자녀에게 가르쳤다.

그의 장·차남이 장가들어 한때 식구가 14명에 이르렀다. 차녀 홍옥희(76·서울 개봉교회) 은퇴 권사는 “해 뜨면 일어나 기도로 시작하고 해 지면 기도로 마무리하는 아버지셨다”며 “그 부지런한 분이 주일이면 논물 대는 일도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주일성수를 하셨다”고 말했다.

홍금산의 ‘오직 전도’는 양평과 양주 일대에 소문나 있었다. 한꺼번에 청년 10여명이 예배당으로 몰려와 예수를 믿었다. 그들 부부 손에 인도된 이만 수백명이었다. 홍금산으로부터 전도돼 직분자가 된 이들이 또 전도했고, 인근에 예배당을 세웠다. 하지만 핍박도 심했다. 마을마다 서낭당과 장승을 섬기던 때였다. 그는 우상을 도끼로 찍어 불태우다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하루는 홍금산이 어느 집에 들어가 바구니를 팔다 말고 예수 얘기를 한 후 “구원을 얻으라”고 권하니 “예수를 믿고 싶은데 저 터주(벼를 넣어 짚으로 덮은 항아리)대감이 노할까 봐 못 믿겠소”라고 했다. 홍금산은 터주를 뒤엎었다. 주인이 하얗게 질렸다. “이 벼를 찧어 내가 밥을 해 먹고 오겠소. 내가 벌을 받으면 당신이 예수를 믿지 않아도 좋소.” 터주가 우상이었음을 확인한 주인은 예수를 믿었다. 한편 홍금산은 상심리교회 교역자가 비었을 때 영수와 다를 바 없는 사역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전도가 막힐 때면 제게 성가대로 따라나서라고 했어요. 홍천 서면의 먼 친척 동네(현 홍천 서면 중방대리) 전도를 위해 험한 산길을 걷고 또 큰 고개를 넘었어요. 양평에서 홍천읍으로 가는 중간, 즉 단월까지 목탄버스를 타고 가서 그곳부터 산길 20㎞를 걸었어요. 이렇게 전도해 결실될 때 아버지는 아이처럼 행복해하셨어요.”

홍옥희 권사의 얘기다. 요즘 수도권 캠퍼들에게 인기인 ‘산음자연휴양림’ 고개를 어린 소녀가 아버지 등에 업혀 넘었다. 장녀 고 홍옥순 권사는 남편 김종한과의 사이에 네 아들을 두었다. 그 아들들은 현재 상심리교회 실무 장로·집사다. 홍금산의 차녀 옥희, 삼녀 옥분, 사녀 은분씨 부부도 각기 권사·장로(모두 개봉교회)로 은퇴해 지금은 상심리에 모여 산다. 2남 4녀 가계도를 그리면 목사, 장로 등 직분자가 수십명이다.

홍금산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한 대목을 ‘상심리교회 100년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상심리에 들어온 인민군이 미군 폭격으로 분산돼 각 집에 숨어들었는데 어느 날 구더기가 생길 정도로 부상이 심한 인민군이 홍금산의 집에 들어갔다. 홍금산은 그의 상처를 싸매주고 기도해 주며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전도했다.’

홍금산은 별세 직전까지 상심리나루터에서 전도지를 건넸다. 막내딸 은분씨의 기억.

“그때는 가난해 한 집에 8명의 식구가 살았어요. 제가 아버지와 한 방을 쓰는데 아버지가 예배당 새벽종을 치려는데 시계가 없었죠. 샛별 위치를 보고 추측해 종을 쳐야 했어요. 아버지께서 몇 번씩이나 별을 보고 들어와 때를 기다리던 기억이 납니다. 밤잠 설치시며 종을 치곤 하셨죠.”

양평=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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