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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해 특파원의 여기는 워싱턴] 美 아시아계 증오범죄 낮은 기소율 뒤엔… 가슴 아픈 사연

한 아시아계 여성이 지난 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컬럼버스 공원에서 열린 혐오 범죄 반대 집회에 참석해 ‘스톱 아시안 헤이트’(#STOP ASIAN HATE·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를 멈춰라)라고 쓰인 손팻말을 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금 미국에서 아시아계를 겨냥한 증오 범죄는 뉴욕 등 대도시의 우범지대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카운티는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 미국의 ‘강남 8학군’으로 묘사돼 한국에서도 유명세를 탄 지역이다. 이 지역은 미국 수도 워싱턴의 베드타운 역할을 하고 있어 미국 정부와 의회 관계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의 외교관들, 기업 주재원들, 특파원들이 상당수 거주해 ‘외교 타운’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런 페어팩스카운티 내의 한 중학교에서 지난 3월 말 아시아계 증오 범죄로 추정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학교 수업이 끝난 이후 미국 학생 4명이 교내에서 아시아계 학생에게 침을 뱉고, ‘반(反) 아시안’ 폭언을 퍼부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지역 경찰은 이 사건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인종차별과는 거리가 멀었던 페어팩스카운티의 학교에서조차 아시아계 증오 범죄로 추정되는 사건이 발생해 한인들은 물론 미국 지역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번 사건은 아시아계 증오 범죄가 미국에서 크게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아시아계 증오 범죄가 특히 위험한 것은 여성과 노약자를 타깃으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최영수 변호사는 3일(현지시간)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많은 한인들이 외출을 자제하는 등 아시아계 증오 범죄에 대한 공포가 한인 사회에 퍼져 있다”고 말했다.

증오 범죄 기소… 처벌로 추가 피해 예방

미국 내에서 아시아계 증오 범죄가 증가하는 직접적인 원인은 코로나19다. 코로나19가 중국에서 시작되면서 그 분노가 아시아계를 향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미국에서 증오범죄 표적은 흑인·유대인·동성애자였지만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아시아계가 새로운 증오범죄의 타깃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달 16일 애틀랜타에서 발생했던 총격 사건은 아시아계 혐오가 폭발한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한인 여성 4명을 포함해 아시아계 여성 6명이 숨졌다. 그러나 현지 경찰은 용의자인 21세 백인 남성 로버트 애런 롱에 대해 증오 범죄 혐의로 기소하는 데 주저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범죄 혐의에서 증오 범죄 혐의는 제외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해지고 있다.

증오 범죄로 기소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우선, 증오 범죄 혐의가 입증되면 형량은 더욱 늘어난다. 매서운 채찍이 가해지는 것이다. 처벌 수위가 높아지면 이와 비례해 증오 범죄가 줄어드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사법당국만 탓할 것이라는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한 한인 변호사는 “미국 형법에서 증오 범죄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선 공격 대상에 대한 ‘편견(bias)’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면서 “용의자의 과거 언행 등 객관적 증거가 없을 경우 ‘편견’이라는 심리적 부분을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돈 노린 건지, 증오범죄인지 구분 힘들어

그러나 유독 아시아계를 향한 공격에 대해선 증오 범죄로 기소되는 비율이 낮다. 뉴욕타임스(NYT)는 이 이유를 세 가지로 분석했다.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슴 아픈 사연이 숨겨져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아시아계의 미국 이민 역사와 맞물려있다. 한국 등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미국에서 상점 등 소규모 자영업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NYT는 “아시아계의 범죄 피해자들이 강도 등을 많이 당하면서 범죄 동기를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돈을 노린 범행인지, 개인적 원한 관계인지, 증오 범죄인지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두 번째는 아시아계 범죄 피해자들이 신고를 꺼린다는 것이다. 아시아계가 피해를 입고도 신고를 하지 않은 것은 보복의 두려움과 언어적 장벽 때문이라고 NYT는 설명했다. 문제를 만들기를 싫어하는 아시아계의 문화적 정서도 원인으로 분석된다.

세 번째는 다른 증오 범죄에 비해 명확한 상징물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유대인 혐오 범죄의 경우 히틀러의 나치당 상징인 ‘스와스티카(swastika)’와 연관된 사례가 많다. 스와스티카는 ‘만자(卍字)’ 모양의 십자 표식이다. 흑인을 표적으로 한 범행의 경우에는 과거 흑인들을 목매달아 숨지게 만들었던 올가미(noose)와 극우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KKK(쿠 클럭스 클랜)’의 흰색 복면과 망토가 증오 범죄 입증에 결정적 증거로 활용된다. 하지만 아시아계를 겨냥한 혐오 범죄에는 이런 ‘스모킹 건’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시아계 증오 범죄를 입증하는 것은 흑인·유대인을 표적으로 한 혐오 범죄를 증명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 NYT의 분석이다.

바이든, ‘아시아 혐오’ 잠재울까

아시아계 혐오에 기름을 부은 사람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중국 바이러스”, “쿵 플루(Kung Flu·쿵푸와 독감의 합성어)”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반 아시아계 정서를 확산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아시아계를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자신의 코로나19 부실 대응 책임을 떠넘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 바이든 대통령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애틀랜타 총격 사건 발생 사흘 뒤였던 지난달 19일 애틀랜타를 직접 찾아 “가슴이 찢어지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우리는 목소리를 내고 행동해야 한다”고 외쳤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시아계 증오 범죄를 막기 위한 대책들도 내놓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미국 정부 내의 각 부처 간 정책을 조율할 담당자를 임명키로 한 것이다. 미국 정부가 힘을 집중해 아시아계 증오 범죄에 대처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또 아시아계 피해자를 돕기 위해 4950만 달러(559억원)의 기금을 마련키로 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해법이 얼마나 약효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트럼프 전 대통령보다는 아시아계 혐오 범죄를 비롯한 인종 차별 문제 극복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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