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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佛 감시할 것”… 넬슨 제독 호국정신 숨쉰다

런던 트라팔가 광장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영국의 국민영웅 넬슨 제독을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 광장 중심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51m 높이의 화려한 코린트 양식의 기둥이 있고, 그 꼭대기에는 5m 크기의 넬슨 동상이 세워져 있다. 동상은 전투에서 한쪽 눈과 팔을 잃었던 넬슨 제독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트라팔가 광장을 내려다보는 곳에 국립미술관(내셔널 갤러리)이 있다. 원래는 내셔널 갤러리 앞 도로에 차가 다녔으나 이를 보행로로 바꾸면서 시민과 관광객들이 트라팔가 광장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넬슨 기념비의 네 모서리에는 사자상이 있는데 다리가 크로스가 아닌 일자형으로 돼 있다. 싸움을 포기한 자세다. 영국을 구한 넬슨을 영웅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왕권을 상징하는 사자를 무기력하게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을 다했습니다.”

‘영국의 국민영웅’ 호레이쇼 넬슨 제독은 1805년 10월 21일 마지막 전투인 트라팔가 해전에서 적군이 쏜 총탄을 맞고도 이렇게 외쳤다. 마지막까지 전투를 독려했던 그는 자랑스러운 부하들이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을 듣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순신 장군이 1597년 퇴각하던 일본군과의 마지막 대결인 노량해전에서 총탄을 맞고 순국한 것과 흡사하다.

1804년 황제에 즉위한 나폴레옹이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로 영국을 침공할 계획을 세웠을 때 영국 국민들은 지중해 함대사령관을 맡던 넬슨 제독에게 희망을 걸었다. 한쪽 눈과 팔을 잃으면서도 자신이 참여한 모든 주요 해전을 승리로 이끈 그는 이미 영국의 신화적 존재였다. 그에 대한 부하들의 신뢰와 존경은 절대적이었다.

역사의 대전환점이 된 트라팔가 해전은 1805년 이베리아 반도 남쪽 끝 지브롤터 해협 카디츠 서쪽에서 벌어졌다.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 소속 23척의 군함 중 20척이 격침되거나 나포됐다. 영국 함대의 손실은 한 대도 없었다. 이 해전 이후 유럽을 호령했던 나폴레옹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영국은 향후 100년간 독보적인 해상 강국의 지위를 누리며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트라팔가 광장은 국민영웅 넬슨 제독을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 19세기 초 가장 영향력 있던 런던의 건축가이자 도시조경사인 존 내시가 설계했다. 동시대인들도 위대한 거장이라 칭송했던 내시는 여러 건축양식의 장점만을 딴 ‘회화적인’ 건축양식의 대표주자였다. 트라팔가 광장은 의도적인 비대칭과 불균형의 미학을 추구했던 내시의 건축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광장 중심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51m 높이의 화려한 코린트 양식의 기둥이 있고, 그 꼭대기에는 5m 크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높은 곳에 동상을 세운 이유는 “내가 죽어서도 프랑스를 감시할 수 있도록 높은 곳에 올려 달라’는 넬슨 제독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넬슨 동상은 전투에서 한쪽 눈과 팔을 잃었던 모습 그대로 재현돼 있다. 광화문광장에 우뚝 선 이순신 장군 동상이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는 일본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기념비는 1841년에 완성됐다. 기념비 하단의 받침대 사면에는 넬슨 제독의 유명한 해상 전투가 청동 부조로 묘사돼 있다. 여기에는 감동적인 문구가 새겨져 있다.

“영국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

국민들의 사명감을 일깨우는 넬슨 제독의 말이다. 매년 10월 21일 트라팔가 전투를 기념하는 ‘트라팔가 데이’가 되면 넬슨 기념비에 화환을 바치는 행사가 열린다. 광장 사방으로 네 개의 기단이 있는데 네 번째 기단에는 1999년부터 런던시의 공공미술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3년에 한 번씩 새로운 현대미술 작품이 전시된다.

트라팔가 광장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국립미술관(내셔널 갤러리)이 있다. 내셔널 갤러리는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과 함께 유럽의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1837년에 건설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증축되어 너비가 150m에 달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거대한 미술관에 이르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보티첼리, 모네, 세잔, 반 고흐, 렘브란트 등 거장들의 다양한 작품 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광장 주변에는 국립 초상화 미술관인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도 있다. 영국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의 초상화가 예술 사조에 따라 여러 층에 나뉘어 전시돼 있다. 국립 미술관 오른쪽에 있는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성당은 트라팔가 광장 주변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1222년에 처음 설계됐고 1542년 헨리 8세의 명으로 재설계됐다.

트라팔가 광장과 국립 미술관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설계됐다. 원래는 내셔널 갤러리 앞 도로에 차가 다녔으나 이를 보행로로 바꾸면서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트라팔가 광장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광장과 미술관이 인접해 있어 가족끼리 나들이하기에도 좋고, 여행객들에게도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가 됐다. 런던시는 차량으로 숨막히는 트라팔가 광장을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이나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같은 진정한 시민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1단계 조치로 트라팔가 광장 북쪽으로 차량 통행을 금지했다.

이 조치는 새로운 광장 조성의 신호탄이었다. 시민들은 레스티 광장에서 국립미술관을 거쳐 도보로 트라팔가 광장에 진입할 수 있게 됐다. 우리나라도 광화문광장과 세종문화회관 사이의 차도를 없애고, 이를 보행공간으로 조성해 광장에 대한 접근성을 높일 계획이다.

유럽에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인 지난해 2월 20일 트라팔가 광장을 찾았을 때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시민들과 관광객이 광장을 거닐고 있었다. 트라팔가 광장 넬슨 기념비의 네 모서리에는 사자상이 넬슨 제독을 호위하고 있다. 연인들이 사자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어린이들은 사자상에 올라가 즐겁게 노는 모습이 정겨웠다. 사자상을 보면 다리가 크로스가 아닌 일자형으로 돼 있는데 이는 사자가 싸울 자세를 포기한 것을 의미한다. 건축가 존 내시가 영국을 구한 넬슨을 영웅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사자(왕권)을 무기력하게 묘사한 것이다. 광장 한켠에 있는 분수대는 시민과 관광객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솟아오르는 물줄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분수대 턱에 앉아 차분하게 광장을 감상할 수 있다.

매년 12월에는 영국이 나치로부터 노르웨이를 구해준 보답으로 노르웨이 정부에서 보내온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된다. 또한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런던 시민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 인산인해를 이룬다. 특히 연초에는 희망찬 새해를 맞기 위해 광장을 찾은 연인들이 곳곳에서 키스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트라팔가 광장은 넬슨 제독의 삶을 통해 애국심과 사명감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또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을 진정한 영웅으로 대접할 줄 아는 영국 사회로부터 과거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도 광화문광장에서 이순신장군 상을 통해 애국심을 일깨우고, 세종대왕 상을 바라보며 애민사상을 깨우칠 때 광화문광장은 단순한 휴식공간이나 관광명소를 넘어 애국·애민의 상징적 공간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런던= 글·사진 김재중 선임기자 j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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