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일제 갖은 고문 속에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다

독립운동가 선우훈 장로가 1912년 1월 일제 헌병들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던 서울 남산 옛 조선총독부 터. 숭의여전 교문에서 본 풍경으로 ‘서울 애니메이션센터’ 공사가 한창이다. 1950~70년대 KBS·국토통일원 자리이기도 했다. 이 일대는 총독부 부속 건물이 즐비했다. 선우훈은 고문을 이겨내고 끝까지 저항했다.
 
청계천2가 수표교. 선우훈이 포승에 묶여 총독부로 끌려가며 한탄하던 곳이다.



 
총독부 터 앞길. ‘국치의 길’로 역사 답사 코스다.
 
일제가 작성한 항일인사 기록 카드. 선우훈은 19세에 체포돼 갇혔다.
 
3·1운동 33인의 한 사람인 이명룡 선생(오른쪽)과 함께한 선우훈.




1912년 1월 25일 아침. 한 기독 청년이 광화문 앞 일본 제국주의 제2 헌병대 유치장을 나와 남산 조선총독부 감옥으로 끌려갔다. 열아홉 이 청년은 이날 새벽 평북 선천북교회 예배당 강대상 앞에서 흰옷을 입고 찬송가 부르는 꿈을 꾸었다.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야 물과 피를 흘린 것….’

그리고 아침이 되니 헌병 하사가 옷보자기를 챙기라고 했다. 청년은 함께 잡혀온 선천 신성학교 교사와 동창에게 “예수님 죽으심을 쓴 찬송을 꿈속에서 불렀소. 나는 오늘 총독부로 끌려가 그놈들과 싸우다가 맞아 죽을지도 모르겠소”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과 마지막 인사를 했다. 청년은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수표교를 거쳐 악명 높은 남산 총독부를 향해 끌려갔다. 날씨는 청명하고 바람은 고요했다. 다리를 건너 골목골목을 지나는데 어느 집 마당에 황소 한 마리가 볕을 쬐며 새김질하는 것을 보았다.

‘저기 우는 저 황소야 코 뀌었다고 설어 마라 나라 잃은 이내 몸은 네 신세가 부럽구나.’

그 청년은 독립운동가 선우훈(서울 성도교회 장로)이다. 그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된 것은 1911년 10월 24일 신성학교 채플을 막 마치고 교실 문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순사와 헌병 50~60명이 평화롭던 학교에 들이닥쳐 모든 교직원과 학생을 강당으로 몰아넣고 교사 7인과 학생 20명을 추려냈다. 그리고 포승으로 묶고 수갑을 채웠다.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던 선천 사회는 공포와 전율에 빠졌다. 이른바 일제의 ‘105인 사건(신민회)’의 시작이었다.

지난 1월 17일 주일. 당시 제2 헌병대 자리(정부서울청사 별관)와 이웃한 종교교회에선 코로나19 여파로 소수의 인원만 참석한 채 온라인예배가 이뤄졌다. 선우훈은 바로 이 자리, 제 2 헌병대 유치장을 나와 ‘골고다 언덕’이었을 남산 총독부를 향해 가야 했다.

이날 선우훈의 ‘고난의 길’을 따라 정부서울청사 별관, 광화문 네거리, 청계광장, 수표교 다리, 초동 골목길 등을 거쳐 예장동 조선총독부 터에 닿았다. 총독부 터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조성을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일대, 즉 숭의여전, 리라초교, 드라마센터, 남산골한옥마을 등은 그 무렵 일제 무단통치의 본산이었다. 일본 신사와 사찰이 총독부를 떠받들며 남산 자락에 조성됐다. 총독부 일대는 박정희 시대 중앙정보부가 있던 곳이다. 우리는 이 일대의 길을 ‘국치의 길’로 부른다.

경성으로 압송된 선우훈의 죄목은 미국 선교사와 신성학교(교장 조지 매큔 선교사) 교사 등의 사주를 받아 데라우치 조선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때 선우훈은 물론 김구 양기탁 이승훈 안명근(안중근 동생) 윤치호 등 신민회 민족지도자 600여명이 검거됐다. 헌병대에서 총독부로 이송된 선우훈은 이날부터 형언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았다.

“너는 기독교 신자로 우리를 왜놈왜놈하고, 우리 말은 듣지 않고 서양놈 말이면 죽을 데라도 잘 가는 놈인 줄 안다. …유치장에 있을 때도 매일 성경을 읽고 맹세하기를 총감부에서 아무런 악형을 할지라도 죽어도 불복하자는 결심을 했다는 것도 잘 안다. 총독과 요로 대관을 죽이고 조선독립을 하려고 밤낮 비밀회의를 하였지!”

그들은 부저를 달궈 다리를 지졌다. 혀를 빼 잡아당겼다. 젖은 종이로 얼굴을 덮고 숨을 못 쉬게 했다. 매달고 코에 물 먹이고, 몽둥이와 채찍으로 때렸다. 할 수 있는 악형을 다했다. 죽기 직전까지 가면 ‘아부나이 아부나이(안돼, 안돼)’ 하며 숨을 돌려놓았다.

“하나님의 공의는 무심치 않은 것이니 이 원한을 풀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선우훈은 날조하려는 그들에 저항했다. 일제는 그해 12월 말 예정된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데라우치가 참석하는데 선교사들이 그를 암살하라고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허위 자백시키려 했다. 데라우치는 이완용 등과 한국을 삼킨 원흉이었다. 선우훈은 혹독한 매질에 정신을 잃었다.

‘그들은 기독교 박멸과 애국자 일망타진을 통해 민족정신을 없애려 했다…나는 혀를 가로 물었다. 하루라도 깨끗이 살다 죽고 싶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불러주소서. 오, 하나님’(선우훈 증언)

고문 10여일이 되어도 그가 버티자 함께 끌려온 교사와 친구를 대질해 조작하려 들었다. 고문을 견디지 못한 친구는 그에게 사주했다고 덮어씌웠다. 한 교사는 “이보게 훈이, 그러니 어쩌겠나…”라고 말한 후 죄책감에 정신을 잃었다. 그래도 자백을 하지 않자 그들은 예수를 떡으로 유혹하던 사단처럼 과자 등 먹을 것으로 유혹했다. 이도 안되자 도쿄관비 유학생 제안도 했다. 그 감방에서 이 사건의 주모자로 잡혀온 기독명망가 윤치호가 특식을 받아가며 감옥 생활하는 것을 목격했다. 훗날 그는 친일파가 되고 말았다.

선우훈은 남산 경복궁이 보이는 시내를 바라보며 피 토하듯 울부짖었다.

“간악한 소굴 한양아, 충신과 의인을 삼족까지 멸하고 이천만 백성을 노예로 만든 죄악의 소굴 한양아, 망국멸족의 원흉인 이완용과 송병준이 아직도 저곳에 있거늘…의인의 피는 살아 있고 그 힘은 무섭다. 의인 열 명만 있으면 백만인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셨다. …나는 이 암흑 속에서 새 광명을 찾았다. 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다.”(저서 ‘민족의 수난’ 중)

일제는 그가 30여일 고문해도 날조된 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자 눈을 가려 형장으로 데려갔다. 헌병이 그를 남산 늙은 소나무에 묶었다. 그 밑은 구덩이였다. “일국의 원수를 죽이려는 놈을 총살한다. 부모에게 유언이 있으면 해라.”

“없소. 주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제 죽이시오.”

‘땅’ 하고 총소리가 났다. 이튿날 아침 그는 물벼락에 깨어났다. 총살은 저들의 최후의 위협이었다.
 
선우훈 (1892~1961) 연보

·1909년 대성학교 입학·신성학교 전학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됨
·1913년 7년 징역 끝 무죄 석방
·1914년 세브란스의전 입학
·1915~33년 상해 임시정부 활동
·1935년~해방 수양동우회사건 옥고 및 자택연금
·1945~46년 조선민주당 활동과 월남
·1950년 전후 성도교회 장로 및 정치 활동

글·사진=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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