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채명신 장군의 기도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013년 11월 28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가수 패티 김이 부르는 찬송가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가 울려 퍼졌다. 이곳 2번 사병묘역에 안장될 채명신 장군의 영결식 현장이었다. 예비역 육군중장인 그는 자신의 유언대로 26.4㎡(8평) 장군 묘역이 아닌 3.3㎡(1평) 사병 묘역에 묻혔다. 장군이 사병 묘역에 안장된 것은 현충원 사상 최초였다. 당시 육군 군종실장이었던 김태식 목사는 “신앙과 삶이 일치하기가 쉽지 않은데 채 장군이야말로 일치했던 분”이라며 “정말 나라를 사랑하셨다”고 추모했다.

6·25 유격전의 전설, 월남전의 영웅으로 불린 채 장군은 1926년 11월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났다. 외조부 박진준 장로는 구한말 미국인 선교사를 통해 신앙을 갖게 돼 평남 중화군 대기암교회 등 여러 교회를 세운 분이었다. 채 장군은 광복과 함께 독학으로 자격증을 따서 진남포 인근 소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덕해교회 청년부 교사로 섬기며 목회자가 되겠다는 꿈도 키웠다. 하지만 북한 정권이 기독교 탄압을 본격화하며 교회 폐쇄를 명령하자 47년 1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었다.

서울에 가면 신학을 공부할 계획이었지만, 전쟁을 준비 중인 북한과 달리 좌우 대립과 갈등이 극심한 남한 현실을 보고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육사 5기로 입학한 그는 48년 4월 소위로 임관해 제주도 4·3사건에 투입됐고 6·25전쟁 때는 국군 최초의 유격부대인 백골병단을 이끌고 적진 깊숙이 침투하는 등 사선을 넘나들었다. 그는 “늘 하나님께서 방패 되심을 믿었기에 두려움이 없었다”고 간증했다.

65년에는 초대 주월한국군총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으로 베트남에 파병됐다. 그는 병사들에게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베트콩이 침투한 곳을 전투지역으로 정한 뒤 ‘움직이는 모든 것은 사살해도 좋다’고 명령한 미군과 비교된다. 예편 후 외교관으로 봉직하다 은퇴한 그는 교회 장로로서 베트남선교와 인도적 지원, 민간협력에 힘을 보탰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채 장군 이야기를 다시 접한 것은 미국 공영방송 PBS가 2017년 제작한 10부작 다큐멘터리 ‘베트남전쟁’(19일 종영)을 넷플릭스에서 보면서다. 고품질의 영상과 사진을 바탕으로 1858년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부터 150여년 역사를 압축적으로 다룬 수작이었다. 남북 베트남 군인과 민간인의 시선도 균형 있게 다뤄 베트남전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하지만 1부당 상영시간이 2시간 가까운 대작인데도 한국군 이야기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게 아쉬웠다. 이를 메워보려고 월남전 파병 역사를 찾아보다 채 장군을 다시 만났다. 그는 장군이기 이전에 신앙인이었고 치열한 전투현장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다.

채 장군에게 공만 있는 건 아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5·16쿠데타에도 가담했다.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의 양민학살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참군인이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해 6월 현충일 추념사에서 “애국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다”며 채 장군의 참다운 군인정신을 기렸다.

채 장군은 전쟁영웅이었지만, 호전적인 냉혈한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간곡히 호소했다. 전쟁의 참혹성과 비인간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2002년 3월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북이 다 같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한반도에서의 전쟁 재발은 절대로 방지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뜨거운 기도로서 간구해야 합니다.” 6·25 70주년을 앞두고 북한의 도발로 한반도 긴장이 다시 높아진 가운데 한국교회에 주는 메시지인 것 같다.

송세영 종교부장 sysoh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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