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민 사역 일본인 목사, 제주에 450만평 농장 만든 까닭은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앞줄 가운데 오른쪽)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로 유학을 떠나기 전 일본 고베의 빈민 어린이들과 사진을 촬영했다. 국민일보DB



 
가가와 목사(왼쪽 두 번째)가 1935년 미국에서 동료들과 길을 걷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한 가가와 목사. 국민일보DB, 가가와 도요히코 기념관 제공


‘20세기의 성자’ ‘빈민들의 아버지’.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1888~1960·사진)를 둘러싼 수식어다. 일본 노동운동과 생활협동조합의 창시자인 그는 기독교 사랑의 힘으로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본 고베 빈민의 자활을 돕기 위해 전력을 다했고 이런 여정을 담은 자전적 소설 ‘사선을 넘어서’는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다.

올해 서거 60주년을 맞는 가가와 목사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그가 일제강점기 제주도에 1487만6033㎡(450만평) 넓이의 농장을 소유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여의도 3.3배 넓이였던 이곳에 ‘풍행(豊幸)농장’을 세웠지만, 구체적인 위치와 사역 내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제주도는 일제의 군사 거점이었다. 한때 군인만 6~7만명이 주둔했다고 한다. 전략적 이유로 제주도와 일본은 가까웠다. 일본 오사카와 제주도를 잇는 정기선박편까지 있었다.

제주도 향토사학자인 김인주 봉성교회 목사는 8일 “제주 교회가 해방 직후 가가와 목사의 정신을 따라 농장에서 사역을 이어가려고 노력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무산됐다”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제주노회도 여러 차례 제주에 남긴 그의 삶과 신앙을 추적했으나 단서가 많지 않아 번번이 실패했다”고 밝혔다. 이어 “서귀포 상효동 일대에 농장이 있던 것으로 추정하지만, 부동산 등기나 농장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언제 농장이 시작됐고 어떤 사역을 했는지 입증할 길이 없다”고 아쉬워했다.

2014년 제주노회에 가가와 목사의 농장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던 김 목사는 그의 서거 60주년을 맞은 지난달 23일 이런 내용을 온라인에 공개하며 관심을 호소했다. 그는 “고베에서 빈민 사역을 성공적으로 했던 가가와 목사가 제주에서도 빈민 구제와 이들의 자활을 돕는 사역을 꿈꿨을 것”이라고 봤다.

조남수(1914~1997) 목사도 이 농장에 대한 언급을 남겼다. 조 목사는 제주 4·3사건 때 양민 수천 명을 살려 ‘한국판 쉰들러’로 불린다. 그의 회고록에는 “농장에서 백년대계를 꿈꿨다”는 기록이 있다.

“가가와 도요히코의 농장에 감독관으로 와 있던 고바야시 세이치가 우리교회에 출석해 서로 알게 됐다. (농장에서) 40여 정보를 대여받아 자선원을 설립해 무의무탁 노인을 돌보며, 인근 부락의 극빈 청소년을 모아 야학도 개설해 가르치다 비밀결사 모의라는 죄목으로 고바야시와 나는 일본 관헌에게 잡혀가 1주일간 모진 곤욕을 당했다. 해방과 함께 가가와의 농장 1400정보를 전부 인수해 백년대계를 꿈꿨지만, 1947년 노회의 지시에 따라 모슬포교회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김 목사는 “제주도가 너무 시골이었다. 같은 서귀포라도 모슬포와 농장 사이를 오가며 사역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라면서 “농장을 직접 기억하는 조 목사 같은 분의 노력이 무산되면서 후대에도 완전히 잊힌 것 같다”고 했다.

가가와 목사에 관한 연구가 활발한 일본에서도 제주도 농장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요시조 다나카 일본 예수단 이사가 쓴 글 중 파편 같은 흔적이 남았다. 그는 “지금은 한국령인 제주도에 1400만 정보(450만평)의 농장이 있다. 이곳의 평지에는 쌀과 보리가 경작되고, 중산간 지대에는 소나무와 삼나무, 노송나무가 식림되고 있다”고 썼다.

역사학자들은 가가와 목사의 제주 사역이 후대에 알려지지 않았던 데는 분단의 아픔이 스며있다고 본다.

교회사를 전공한 뒤 일본 선교사로 활동 중인 홍이표 박사는 “농장이 있었던 기간이 짧았고 사회주의이었던 그의 정치 성향에 대한 의심이 컸기 때문에 혼란기에 잊혔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사랑과 사회정의의 사도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신앙과지성사) 번역에도 참여한 홍 박사는 “일제가 패망하면서 꿈을 펼치기도 전 무위로 돌아갔을 것으로 본다”며 “당시 농장에 파견된 인사들의 기록을 보면 농장에서 유토피아를 꿈꿨다는 말도 나오지만, 제주도는 워낙 교통이 좋지 않고 자원이 없어 농장을 키우는 데 어려움이 컸을 것 같다”고 했다. 또 “해방 후 혼란기에 제주교회도 제대로 된 기록을 남기지 못한 것 같다”면서 “그를 빨갱이라고 비난할 정도로 이념 논쟁도 심했다”고 밝혔다.

이치만 장로회신학대 교수도 “해방 직후 제주 4·3사건이 발생한 것도 농장의 존재를 역사에서 사라지게 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면서 “당시 세계적 명성이 있던 가가와 목사가 사회주의자였던 점, 이념 갈등이 심각했던 것 등이 그의 흔적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걸 방해했을 수 있다”고 추측했다. 이어 “가가와 목사에 대한 다양한 역사적 평가가 있다. 그가 제주도에서 어떤 사역을 하려 했고 어떤 꿈을 꿨는지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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