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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독서는 타자에 속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 시간

우리는 왜 책을 읽을까. 김인환 고려대 명예교수는 산문집 ‘타인의 자유’에서 “독서는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창조적 놀이”라고 말한다. 픽사베이




지난주 서효인 시인이 소개한 ‘편집가가 하는 일’을 흥미롭게 읽었다. ‘편집가가 하는 일’은 출판을 의사소통 사업으로 규정한다. 이 책에 따르면 편집가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양방향, 즉 저자와 출판사라는 두 주체와 완전하고도 정확한 의사소통을 해내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책은 소통의 매개일 뿐만 아니라 소통 그 자체이기도 하다. 저자는 독자와 소통하기 위해 책을 쓰고 독자는 저자와 또 다른 독자, 즉 타인과 소통하고 궁극적으로는 타인에 비추어 자신과 소통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러나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저자와 출판사 사이에 얼마나 활발한, 또 격의 없는 대화가 이루어지는지는 의문이다. 작가와 출판사가 계약 문제에 관해 충분히 소통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적잖은 사건들이 그렇지 못한 현실을 짐작케 한다.

편집자와 작가가 격의 없이 대화해야 할 분야는 크게 두 종류다. 하나는 작품에 대한 것이다. 좋은 것은 왜 좋고 부족한 것은 왜 부족한지, 좋은 것은 어떻게 하면 더 좋아질 수 있고 부족한 것은 어떻게 하면 덜 부족할 수 있을지 주저하지 않고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편집자가 작성하는 소개 문구와 줄거리 요약도 논의 대상에서 빠질 수 없다. 다른 하나는 계약에 대한 것이다. 통상 선인세라 부르는 계약금의 유무와 정도 및 계약 기간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외국어판 출간을 위한 저작권 관리나 영상, 공연 등 2차 저작물에 대한 권리를 관리하는 방식은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작가와 출판사는 더 이상 궁금한 게 없을 때까지 논의하고 협의해야 한다. “침묵은 위험하고 자칫 오독되기 쉽다.”

의사소통 산업으로서의 출판에 대해 생각하다 자연스레 한 권의 책을 떠올렸다. 최근 출간된 김인환 평론가의 산문집 ‘타인의 자유’다. ‘타인의 자유’는 문학적 상상력과 인문학적 사상, 그리고 예술적 감각이 깨달음이라는 삶의 치료제로 효력을 발휘하기까지 지속된 오랜 ‘공부’의 결과물이다. 문득 이 책을 떠올린 까닭은, 문학평론가야말로 의사소통으로서의 읽기와 쓰기를 전면에 내세운 채 평생을 작가의 독자로서, 혹은 독자의 작가로서, 말하자면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숙제처럼 책 읽고 글 쓰고 술 마시며 세월을 다 보내고 나니 이제는 가고 싶은 길이 어느 쪽이었는지도 잊어버”린 채 쉰을 넘기고 어느덧 일흔이 넘어 “잘라놓은 그루터기처럼 마음이 말라가고 있다.” 노학자가 스스로를 묘사하는 목소리엔 조금의 과장도, 자조도 섞여 있지 않다. 그래서 더 신뢰 가는 그의 ‘자유론’은 무엇보다 타인의 자유론이다. 타인의 자유론은 타인이라는 다양성 안에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중심의 자리를 거부하는 태도다. 중심을 차지하는 대신 옆을 공유하는 곁가지 존재론은 예술로서의 소통이 다다를 수 있는 미학과 윤리의 정점이 교차하는 장소가 아닐까. 나는 여기서 문학의 자세를 배운다.

곁가지 존재론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론으로 내가 특별히 배워둔 것은 “측면의 독서”다. 측면의 독서는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읽는 것보다 여러 책을 한 번 읽는 것이 더 깊은 의미에 도달한다고 믿는 독서법이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며 바닥까지 내려가 극단을 경험하는 것보다 여러 책 사이를 유영하며 예기치 않은 관계 안에서 생겨나는 다중의 시선으로 한 권의 책을 바라볼 때,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곳에서 의미가 출현한다. 또 이때의 다양성은 모두가 도달하고 싶어하는 깊이에 다름 아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세워진 신념의 장벽이 스스로를 고립시키기에 최적화된 시대, 독서는 타자에게 속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유의 시간이다. 그루터기처럼 말라가고 있다고 말한 선생은 타자의 세계에 속해 있는 자아를 “타인들 틈새에 맺혔다 사라지는 물방울 같다”고 말한다. 말라가고 있다는 말은 선생의 지나친 겸손이 아니었나 싶다. 타인들 속에서 그는 한 번도 마른 적 없는 물방울이었을 것이다.

박혜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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