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 미술] 짜파구리 오찬장의 걸작… 미래를 낙관하는 바다의 색

전혁림 작 ‘통영항’, 캔버스에 유채, 190×640㎝.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에서 구입했다. 이명박 정부 이후 청와대에서 보이지 않았으나 문재인 정부 들어 다시 인왕홀에 걸리게 됐다. 이영미술관 제공
 
2월 20일 문재인 대통령(가운데)과 김정숙 여사(오른쪽), 봉준호 감독이 청와대에서 가진 오찬 장면. 뉴시스
 
2005년 11월 이영미술관을 찾은 노무현 전 대통령 내외가 전혁림 화백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 노무현재단 제공


문재인 대통령도, 봉준호 감독도, 김정숙 여사도 꽃망울 활짝 터트린 봄꽃처럼 파안대소했다. 김 여사는 허리가 뒤로 젖혀질 정도였다. 이른바 ‘청와대 짜파구리 오찬’ 사진 속 분위기는 너무도 유쾌했다. 야당과 보수 언론으로부터 “먹을 때 먹어야지, 아무 때나 먹냐”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까지 했다. 오찬이 있던 2월 20일, 하필 그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 한국 첫 사망자가 나왔다. 첫 확진자가 나온 지 한 달 만의 일이다. 그럼에도 오찬은 충분히 가질만했다. 진보, 보수할 것 없이 국민 모두는 그 쾌거에 얼마나 열광했나.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 4관왕의 대기록을 세웠다. 첫 입성에서였다. 영화 기생충은 방탄소년단이 끌어올린 국민적 자부심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 그러니, 청와대에서 16일 귀국한 감독과 제작자, 배우들을 초청해 밥 한 끼 대접한 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림이다. 그날 청와대 인왕홀에서의 파안대소를 지켜본 그림. 고 전혁림(1916∼2010) 화백의 ‘통영항-한려수도’(2006년)말이다. 사진 속에선 작품의 일부분만 나와서 그 그림을 주목한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에서 그 그림을 구매한 사연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반가움이 앞섰다.

노 대통령이 직접 전시 보고 주문

2005년 11월의 어느 토요일. 노무현 대통령은 이른 아침 TV를 켰다. 마침 뉴스에서 전시회 소식이 나왔다. 구순 전혁림 화백의 신작전 ‘구십, 아직은 젊다’전이었다. ‘구순 화백의 푸른 열정’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90세의 나이에 그린것이라곤 믿기지 않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남해안 바다 풍경 그림이 방송 카메라에 잡혔다. 무슨 일인지 대통령은 “지금 (전시장에) 가자”며 참모들을 채비시켰다. 대통령은 참모들과 버스를 타고 전시장인 경기도 용인 이영미술관을 찾았다. 전시장에 와선 전 화백의 손을 꼭 잡고 다니며 그림 설명을 들었고, 오찬도 나누며 3∼4시간가량을 머물다 갔다.

신작을 포함한 40점이 나왔지만 대통령은 가로 7m가 되는 1000호 대작인 ‘통영항-한려수도’를 사고 싶어 했다. 외국 순방 때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 등 외국 정치 지도자들이 외교 현안 논의에 앞서 소장한 작품 자랑부터 하는 문화 마인드에 자극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시장에 걸린 그 작품은 청와대에 걸기엔 너무 컸다. 청와대 소장용으로 새로 제작하기로 했다. 그래도 가로 6.4m나 되는 대작을 다시 그리기 위해 전 화백은 꼬박 3개월을 매달렸다. 이례적으로 노 대통령 지시로 청와대가 주문한 그 그림은 2006년 봄 청와대에 걸렸다. 국립현대미술관 가격심의위원회는 작품 가격을 2억3000만원으로 산정했으나 전 화백은 “청와대가 구입하겠다면 1억5000만원을 받아도 만족한다”며 작품 값을 낮춘 것으로 전해진다. 작품 값으로 받은 1억5000만원으론 전혁림미술상을 제정했다.

벽화처럼 크기가 어마어마한 초대형 유화 작품 ‘통영항’은 코발트블루를 주조 색으로 해서 통영에서 바라본 다도해 풍광을 구상과 추상을 섞어 동화처럼 그린 것이다. 산과 바다는 파란색으로 처리돼 있고, 섬과 배, 다리, 공장과 집들은 민화처럼 단순화돼 정답게 배치돼 있다. 보고 있으면 활기찬 기운과 따뜻함이 전해져 온다.

노 대통령은 그날 무슨 바람이 불어 전시 구경을 가자고 했을까. 전 화백의 아들 전영근씨가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부산에서 변호사를 하던 시절 알고 지내던 판사 집에서 전 화백의 작품을 접했다. 판사의 부인이 통영에서 교편생활을 했던 전 화백의 제자였는데, 형편이 어려웠던 옛 스승을 돕기 위해 그림 몇 점을 사 줬다. 노 대통령은 연로해서 돌아가신 줄 알았던 전화백의 전시회 소식을 듣자 반가움에 급히 달려갔던 것이다.

노 대통령은 왜 ‘통영항’을 원했을까

그래도 궁금함이 남는다. 저 그림의 무엇이 ‘인간 노무현’의 마음을 흔들어 구매하고 싶게 만들었을까. 전 화백의 화가 인생을 복기해보니 세 가지 면에서 두 사람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됐다. 그것은 ‘지방’ ‘독학’ ‘바다’다. 노 대통령은 검정고시 출신으로 사법시험을 패스해 변호사가 된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 그러나 중앙무대를 마다한 채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대통령 재임 중에는 지역 분권을 주창했고, 퇴임한 뒤에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로 내려가 지역 분권의 가치를 몸소 실천했다. 첫 국회의원 출마를 험지 부산에서 해 보기 좋게 낙선했던 부산의 사나이였다. 바다의 남자였다.

전 화백의 인생에도 그런 요소가 겹친다. 그는 한려수도 바다가 아름다운 경남 통영에서 팔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고, 통영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통영수산학교에 진학했다. 세계문학에 심취한 문학청년이었다. 문학은 세계로 진출하기에는 언어의 장벽이 있다고 생각해 포기하고 대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수산학교시절 아마추어 화가였던 일본인 선생으로부터 배운 게 전부였다. 졸업 후에는 진남금융조합(국민은행 전신)에 취직해 5년간 근무했다. 그러면서 혼자서 그림을 익혔는데, 1938년 부산미술전에 출품한 유화가 턱하니 입선을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는다. 프랑스 유학도 계획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좌절됐다. 해방 이후인 1947년엔 경남 지역의 미술을 활성화시키겠다는 취지로 경남미술연구회를 창립하고, 시인 유치환 김춘수, 음악가 윤이상 등의 지역 예술가들과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했다. 그런 가운데 화가의 등용문으로 통하는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서 1950년대 입선과 특선을 반복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62년에는 무감사로 국전에 진출하기도 했으나 운영 비리에 회의를 느끼고 이후 국전을 외면했다.

그는 철저히 지역 화가로 살았다. 중앙화단과 단절한 채 통영과 부산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했다. 그림으로 생계가 안 될 땐 도자기 그림을 그려 팔기도 했고 교편생활도 잠시 했다. 드디어 80년대 들어 나이 60이 넘어서야 그는 미술계의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중앙화단은 그를 호출하기 시작했고, 서울에서 전시가 자주 열렸다. 86세 때인 2002년엔 국립현대미술관이 주는 올해의 작가에 선정됐다.

전 화백은 독학으로 취득한 서양의 미술사조인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 개념을 흡수해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작품 세계를 걸어왔다. 특히 80년대 이후부터는 표현주의적 분위기가 느껴지던 이전의 거친 붓 터치가 사라지면서 추상성이 강화됐다. 면 처리는 간결해졌고 색은 선명해졌다. 한마디로 색과 면을 특징으로 한다. 밝은 색면이 주는 유쾌함이 있다는 점에선 프랑스 야수주의 화가 앙리 마티스가 연상된다. 소재에 있어서는 해, 달, 새, 문자, 보자기 등 민속적인 소재와 민화적인 요소를 끌어들였고, 색은 오방색의 강렬한 원색을 즐겨 쓴다. 특히 주조색인 청색은 갈수록 밝아져, 덕분에 전 화백의 후기 작품 세계에선 한국인 특유의 낙천성이 느껴진다. 노 대통령을 반하게 한 작품 ‘통영항’에서도 그런 기운이 흘러나온다.

전 화백이 평생 아침저녁 보았을 푸른 바다는 캔버스 위에서 격정적이기보다는 낙천적 기운을 뿜는다. 고향의 바다색을 넘어 미래를 낙관하려는 모든 사람을 위한 상징적인 색이 된 것이다. 그래서 저 작품은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며 지쳐 있는 국민들에게 위로가 되는 그림이다. 봉 감독의 아카데미 쾌거에 가장 어울리는 활기찬 그림. 그게 홍보되지 못해 안타깝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