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순종하는 ‘현숙한 아내의 도리’ 세 가지

이경은 순복음진주초대교회 목사가 2016년 6월 CTS 4인4색 프로그램에 출연해 ‘남편을 세우고 아내를 힘 있게 하며 자녀를 성공 시키는 꿈이 이루어지는 교회’를 추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경은 목사


시편 128편 기록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곧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는 자의 가정에는 천국이 임한다. 남편은 존경받게 될 것이요, 아내는 칭찬받을 것이며 자녀는 크게 잘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내들이 지켜야 할 도리는 무엇인가.

경상도 토박이인 남편은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고 생각하는 가부장적 가정에서 자랐다. 그래서 신혼 초에는 나를 길들일 심산이었는지 종종 시댁 식구들 앞에서 “무릎 꿇어. 잘못했다 빌어”라는 말을 예사로 했다. 친정에서도 무조건 남편 말에 순종해야 한다고 교육받았기에 고분고분 따랐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니 이건 도저히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애가 자라서 이런 모습을 보면 엄마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잘못해야 무릎 꿇지, 아무 잘못도 없이 어떻게 무릎을 꿇어요.” 그때부터 절대 무릎 꿇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매사에 허물을 잡히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보니 성경도 아내의 도리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첫째 아내는 남편을 돕는 배필이 돼야 한다.(창 2:18) 믿음의 가정에서 아내들이 힘써야 할 것은 남편이 하나님 말씀에 바로 서도록 돕는 일이다. 믿지 않는 남편이나 믿음이 연약한 남편 때문에 근심하는 아내가 많다. 나 역시 평신도였던 남편의 연약한 믿음을 도와 주의 종으로 세우기까지 오랜 세월 무던히도 애를 썼다. 말이 집사지 세상과 더불어 짝하고 살던 남편을 보며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

“하나님, 남편을 위해 제가 기도의 제물이 되겠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강산이 두 번 바뀌는 20년이면 충분할까요. 제가 20년 작정하고 기도하겠으니 속히 돌아오게 하소서.”

그렇게 독하게 마음먹고 새벽기도며, 철야기도며 남편을 위한 기도의 단을 쌓았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오래 지체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때에 확실한 방법으로 남편을 변화시키셨다.

믿음이 약한 남편 앞에서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나 주의 종의 허물을 절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조그마한 자랑거리가 있어도 더 강조해서 우리 교회 좋은 교회, 우리 목사님 좋은 목사님, 우리 성도님들 좋은 성도님이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남편이 하나님 은혜로 변화돼 교회에 깊숙이 들어오게 됐을 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당신이 하도 교회, 목사님, 성도 자랑을 하길래 교회가 천국인 줄 알았어요. 와서 보니 마음고생한 일도 있었을 텐데 내 믿음 세운다고 정말 고생했어요. 고마워요.” 이처럼 아내는 남편의 믿음을 든든히 세우는 일에 돕는 배필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둘째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해야 한다.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고전 11:3)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 3:18) 이것이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주신 질서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하다.

내가 여성 성도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남편에게 작은 것(육적인 것)은 져주고, 큰 것(영적인 것)에는 이기세요.” 나는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남편이 요구하는 작은 것에 할 수 있는 것은 순종했고 할 수 없는 것은 순종하는 시늉이라도 했다. 그랬더니 큰 것, 즉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것을 요구할 때 남편은 내 말에 기꺼이 응해주곤 했다.

가끔 “목사님, 우리 남편은 믿지 않습니다. 어떻게 순종합니까”라고 물어보는 아내들이 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벧전 3:1)

남편의 말에 순복하는 아내의 행실을 보고 그 남편이 하나님의 도에 순종하게 되며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아내 된 자들이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을 기쁨으로 감당해야 하는 이유이다.

셋째 아내는 집안일을 잘 보살펴야 한다.(잠 31:27, 딛 2:4~5) 여기서 집안일이란 단순히 가사노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남편과 자녀는 물론 집안 식구들을 잘 섬겨 착한 행실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갓 시집온 나는 ‘며느리가 잘 들어와 집안이 일어났다’는 말을 들으려고 시댁 식구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랬더니 시집살이 2년 만에 시아버님은 온 집안 식구들에게 이렇게 공포했다. “우리 며늘아기는 100점짜리다. 이제부터는 우리 며느리한테 아무도 뭐라 하지 마라.” 그랬기에 제사를 물려받아야 할 큰 며느리인 내가 “신앙을 위해 제사를 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을 때도 아버님은 흔쾌히 허락해 주셨던 것이다.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운다고 말씀한다.(잠 14:1) 믿음의 도리에 순종하는 현숙한 아내로 말미암아 남편이 세워지고, 자녀가 성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내들이여, 하나님께서 가르쳐 지키게 한 말씀대로 행하는 현숙한 여인이 되자.

▒ 아바드리더시스템이란
만약 에스더가 모르드개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용사 된 자에게 교회를 위하고 주의 종을 위하라고 명하신다. 하나님께서 어떤 희생을 요구하실 때 우린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바사의 아하수에로 왕 통치시대 왕후로 세움 받은 이가 에스더다. 아하수에로 왕은 수하에 있던 하만의 지위를 크게 높여 왕의 다른 심복들이 그에게 절하게 했다.

그런데 오직 유대인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다. 이에 하만은 유대 민족을 모두 죽일 계략을 꾸민다. 이 사실을 안 모르드개는 왕후 에스더에게 왕에게 나아가 간청할 것을 요구한다. 에스더는 규례를 어기고 왕께 나아가면 죽을 수도 있음을 염려한다.

그때 모르드개는 어떻게 말하는가.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4) 에스더가 왕후가 된 것이 이때, 즉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냐는 것이다.

에스더는 삼일을 밤낮 금식한다.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라'며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간다.(에 4:16) 얼마나 두렵고 절박했을까. 하지만 자신의 동족을 구원하기 위해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나아갔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유대인의 생명을 구원했다. 뿐만 아니라 유대 민족을 멸하려 했던 하만이 도리어 나무에 매달린다. 만약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은 분명 에스더 대신 다른 사람을 택해 유대인을 구원하셨을 것이다. 왜인가.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 누구를 통해서든 반드시 그 뜻하신 바를 이루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 단지 쓰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너와 네 집은 멸망하리라."(에 4:14)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자리에서 떨어질 뿐만 아니라 징계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에스더처럼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때 순종해 쓰임 받은 인물이 여럿 있다. 그중 한 사람, 이름도 기록돼 있지 않은 나귀 새끼 주인이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슥 9:9)

이를 위해 쓰임 받은 이가 이름 없는 나귀 새끼의 주인이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에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즉시로 자신의 나귀 새끼를 풀어 내어줌으로써 하나님의 때에 쓰임 받게 된다.(눅 19:29~36, 막 11:5~6)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주님의 장사를 준비한 여인. 예수님은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다'고 하시며 복음이 전파되는 곳은 어디서든지 여자의 행한 일을 말하여 기념하라고 말씀하신다.(마 26:6~13)

동정녀 마리아는 또 어떤가. 정혼한 이가 있었고 만약 처녀의 몸으로 수태하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순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위해 쓰임 받았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엘리사벳을 통해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라며 축복하신다.(눅 1:30~42)

이처럼 쓰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이 요구된다. 그것은 물질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의 몸이나 자신에게 귀한 또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그 어떤 것이든 주께서 요구하실 때 응하는 사람만이 '이때'에 쓰임 받는 용사가 될 수 있다.

신앙생활하면서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이때를 위함이라' 고백할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어떤 기회가 주어졌는가. 용사로 세움 받은 목적이 하나님의 때에 쓰임 받기 위함이라는 믿음을 갖자. 에스더처럼 생명을 내어놓는 일일지라 하더라도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자.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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