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완·박인하의 만화는 시대다] 클리셰 묻힌 신선한 무협만화, 뜨거운 의리의 브로맨스

작가 문정후 류기운 콤비는 무협 장르의 클리셰와 파격을 적절히 조화한 무협 만화 ‘용비불패’로 1990년대 한국 만화잡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사진은 ‘용비불패’의 한 장면. 필자 제공
 
‘용비불패’ 속 세계관을 이어받은 스토리로 현재 네이버웹툰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만화 ‘고수’(왼쪽 사진)와 2000년대 초 두 작가가 만든 학습만화 ‘살아남기’ 시리즈. 필자 제공






네이버웹툰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고수’가 2018년 12월 갑자기 연재를 중단했다. ‘고수’는 1996년 소년매거진 ‘찬스’에 ‘용비불패’라는 신선한 무협만화로 등장했던 문정후 작가가 평생의 파트너인 류기운 스토리작가와 손잡고 모든 세대의 팬덤을 형성한 작품이다. 당시 문정후는 류기운의 급작스러운 병을 치료하는 데 집중하기 위해 연재를 멈춘다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류기운 작가가 없는 ‘고수’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용비불패’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함께 했고, 앞으로도 함께 할 겁니다. 류기운 작가가 없으면 문정후는 은퇴합니다.”

문정후에게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문정후가 정교한 데생과 파격적인 연출력으로 무협의 진지함을 풀어낸다면, 류기운은 몰입감 있는 구성과 대사, 수시로 변형되는 개그 캐릭터와 팝업창처럼 등장하는 파격적 칸 구성으로 만화를 밀고 당긴다. 절묘한 협업이다. 축구 외에는 만화밖에 모르는, 청년과 중년을 지나 장년으로 함께 나이 들어가는 두 남자는 아직도 콘티를 앞에 두고 티격태격한다.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자, 한 몸을 이룬 결합체다. 지난해 12월, 만화 연재가 다시 시작된다는 예고에 묵묵히 참고 기다려온 팬덤은 열렬한 응원과 지지로 화답했다. 그리고 ‘고수’는 네이버웹툰의 최정상 인기를 줄곧 ‘고수’하고 있다.

클리셰를 비틀다

문정후는 여타 다른 인기 중진 작가들과는 다르게 독자 앞에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만화계 행사나 선후배 모임도 마찬가지다. 연재에만 집중하는 열정과 “만화 외에는 아는 게 없다”는 부산 남자의 소탈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거 경험했던 아픈 추억도 그 이유 중 하나다. ‘용비불패’ 연재 전성기에 만화계 모임에 초청받아 류기운과 함께 자리에 참석한 문정후는 만화가들 사이에 일상적으로 자리잡은 분위기에 놀라고 실망한다. 문정후는 시나리오 작가로 자신을 소개한 류기운을 자신만큼 인정하고 반기는 분위기가 아닌 것에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다고 한다.

자신의 모든 작품은 류기운에게서 시작됐고 자신은 류기운의 아이디어와 콘티에 작화만 도운 것인데, 주위 사람들은 문정후만 기억한다는 것이 서운하고 안타까웠다는 것이다. 문정후는 이때부터 연재하는 모든 작품에 류기운을 명시한다. 현재 네이버웹툰에 연재되는 ‘고수’ 타이틀롤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류기운, 문정후, 문명주, 한병훈’. 가장 중요한 스토리의 시작과 함께 작화에 참여한 동료들의 이름을 독자 모두에게 알리는 것이다. 이들은 이처럼 하나의 팀으로 완성도 높은 작품을 한편 한편 만들어왔다.

한국 만화사에서 계륵 같은 존재가 ‘만화방’이다. 1950년대 후반, 부산항을 통해 들어온 일본 대본소 만화, 속칭 ‘적본(赤本)’이라 불리던 불법복제 된 ‘빨간책’은 주택가를 중심으로 만화방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 1970~80년대에는 약 2만개의 중소형 만화방이 생겨, 전국 초등학생과 청소년, 20대 청년들의 유일한 엔터테인먼트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 만화방 시장에서 절반을 차지하던 장르가 속칭 무협지로 불리던 무협 소설이었고, 무협 작가들은 만화가만큼 팬덤을 형성했다. 가상의 중원 무림을 배경으로 신화를 버무린 무협 소설은 중독성이 대단한데, 대부분 사파와 정파에 속한 영웅들이 개인의 명분과 문파의 명운을 건 대결의 대서사시를 벌이는 비슷한 설정들이었다.

황성, 사마달, 하승남, 야설록, 묵검향, 이재학, 황재, 천제황 등의 걸출한 작가들이 뛰어난 데생으로 무장한 무협 이야기로 독자들을 만화방에 불러 모았고, 이러한 장르 팬덤은 이후 만화잡지시장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 만화잡지 전성시대를 형성하며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된 ‘붉은매’(글 소주완, 그림 지상월)가 서울문화사에서 독자들을 견인했고, 지금까지 연재되는 ‘열혈강호’(글 전극진, 그림 양재현)는 대원출판사를, ‘용비불패’는 학산출판사를 책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한국만화잡지의 3대 출판사 대표작품이 무협 만화였고, 그중에서도 ‘열혈강호’와 ‘용비불패’는 기존 선배작가들이 형성한 만화방 무협 만화의 장르적 특징을 신선하게 변형시킨 신세대그룹의 도전이었다. 특히 ‘용비불패’는 좌고우면하지 않는 액션과 시작부터 마치 마지막 회처럼 결투를 벌이는 파격으로, 무협 장르의 클리셰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충격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관록의 산물, ‘고수’

부산에서 국내 만화방 시장을 전무후무하게 휘어잡고 리더로 군림한 고 박봉석 작가는 다수의 전속 스토리작가와 전문 제작시스템으로 구축된 10개 이상의 작화팀 100여명을 프로덕션으로 구축하여 1년 평균 400여권의 만화를 출간하던 대형 스튜디오의 보스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런 시스템에 작화팀 막내로 들어가 도제식으로 만화를 배우던 류기운과 문정후는 서로의 작화풍과 실력을 평가해주며 팀워크를 만들어갔다. 이렇게 30년 지기 브로맨스는 1980년대 후반 부산에서 시작됐다.

‘용비불패’와 ‘고수’ 작품 사이에는 두 작가의 경험이 기나긴 다리처럼 오밀조밀하게 연결돼 있다. 이들은 2000년대 초 학습만화 돌풍의 핵으로 뛰어들어 ‘살아남기’ 시리즈를 만들어낸다. ‘동굴’ ‘지진’ ‘산’ ‘남극’ 등에서 살아남는 이야기를 전혀 무협 작가가 아닌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그려냈고 ‘영웅 초한지’도 만든다. 어떤 만화든 독자 구미에 맞게 만들 역량이 있음을 방증한 작품들이었다.

이런 자신감이 일본 진출을 시도하게 했다. 당시 일본에서 연재한 ‘데빌맨 대 암흑의 제왕’은 이들이 작가로서 새로운 충전과 다짐을 하게 한다. 국내에서 ‘괴협전’ ‘소용돌이’ ‘용비불패 외전’을 연재하면서는 더 완성형의 무협 만화 스토리와 작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2011년 다음웹툰에 ‘팔라딘’을 선보이며 만화잡지와 단행본 작가에서 웹툰 작가로의 성공적인 변신을 독자들에게 신고한다. 이후 레진코믹스에 ‘초인’을 등장시키고, 괴물 같은 젊은 작가들의 전쟁터인 네이버웹툰에 ‘고수’를 그리며 여전히 류기운과 문정후는 그들의 시대적 몫을 해내고 있다.

‘신화’로서의 무협

류기운과 문정후의 한결같음은 ‘용비불패’의 주인공 용비와 비룡에서부터 예견됐다. 용비불패에는 단순하게 소비되는 조력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과 동지의 구별이 모호하고, 선악 구분 또한 혼미하다. 등장하는 캐릭터 모두 그들만의 이유로 삶을 살아간다. 단순히 무술에서 최고를 가리는 사람들의 대결이 아니라 문정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을 그려낸다. 그들 모두 욕망이 있고, 지키고 싶은 진심과 인정받고 싶은 소망이 있다.

주인공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낄낄거리다가도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들여다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짠해지는 이유는 그런 부분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의 이익을 찾는 것 같지만, 실상 자신이 지켜내지 못했던 수많은 목숨을 떠올리며 가슴 아파하는 용비의 모습에서 독자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무협을 본다. 늘 비현실적인 말의 형상으로 이야기 속을 헤집는 비룡 또한 작품의 마스코트로 젊은 독자들에게 신선함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네이버웹툰에서 ‘고수’를 만나는 중장년층은 여전히 1990년대 ‘용비불패’를 보며 우울하고 불안했던 20대 당시 자신의 느낌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고수’의 세계관은 독자들에게 여전히 젊었던 시대의 소속감을 부활시킨다. 독자들은 어쩌면 젊은 세대에 밀려 지나가는 현재의 불안감을 ‘고수’를 통해 희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협이라는 장르는 그래서 늘 신화이고, 시간을 되돌리는 묘한 장치다. 그 중심에 문정후와 류기운이 있다. 이들의 변치 않는 창작 열정과 진정성에 독자들은 언제나 든든하다.

<한창완 세종대 융합예술대학원장·만화애니메이션텍 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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