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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풍경화] 2020년에는 스무 권의 책을



힘들다. 손님들이 좀비처럼 보인다. 세상 모든 사람이 눈이 멀어 더듬거리며 먹을 것을 찾아다닐 때, 우리 편의점도 지금 이 손님들에게 무참히 약탈당하겠지. 주제 사라마구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으며 내내 그런 상상을 했다. 코맥 매카시 소설 ‘로드’에는 지구 멸망 후 살아남은 어린이가 어렵사리 발견한 콜라 한 캔을 들이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뒤로 편의점에서 콜라를 진열할 때면 ‘이것이 인류 마지막 콜라는 아닐까’ 엉뚱한 사명감을 느끼곤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는 주인공이 편의점에서 맥주와 위스키 등을 구입하는 내용이 있다. 그 페이지를 읽을 때 어디에 있는 어떤 모습의 편의점일까 찬찬히 그려보았다. ‘마이 코리안 델리’는 문예지 편집자인 미국인 남성이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여 뉴욕에서 투잡으로 편의점을 운영하며 겪은 일을 담은 책이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편의점 안팎 풍경은 가까운 빛깔을 지녔구나, 뉴욕이든 서울이든 편의점 점주가 느끼는 감정은 비슷하구나, 무릎을 치며 공감하며 읽었다. ‘달밤의 제주는 즐거워’는 제주 애월에서 편의점 알바로 일했던 차영민 작가가 쓴 에세이다. 제주든 서울이든 편의점의 하루는 같은 길이 시침과 분침을 갖고 있구나, 알바와 사장의 느낌은 이렇게 같고 다른 측면이 존재하누나, 흐뭇하게 웃으며 읽은 책이다.

편의점 계산대에 앉아 책을 읽는다. 나는 책 읽는 속도가 느려 한 페이지 읽는데 5분, 10분은 걸린다. 그마저 손님이 들어오면 멈췄다 다시 읽고, 읽은 데 또 읽고, 상품 들어오면 진열하느라 한두 시간 건너뛰고, 청소하고 발주하고 식사 시간 제하면 하루에 고작 스무 페이지 정도 읽을까? 때로 너댓 페이지 읽다 그치기도 한다. 그러한 시간의 낟알도 모아놓으니 따뜻한 밥 한 공기가 되더라. 보름에 한 권 너끈히 읽는다.

손님과 알바와 계산과 진열과 발주와 청소 틈새에 읽는 것이니 소설이나 에세이를 편식하게 되는데, 때로 지나치게 몰입하다 추억을 남긴다. 폴 칼라니티 에세이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읽을 때는, 당연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손님이 들어왔는데, 처음엔 내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더니 계산을 치르고 나갈 때 자꾸 뒤돌아보더라. 얼마나 장사가 안됐으면 편의점 한구석에 앉아 울고 있을까, 아마도 그런 걱정을 하셨으리. 줌파 라히리 소설에는 인도 음식 이름이 여럿 등장하는데, 그를 통해 나는 ‘사모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우리 편의점에 종종 들르는 인도계 손님에게 ‘사모사 맛있나요?’라고 서툰 영어로 물었는데, 그가 기쁨에 들뜬 표정으로 한바탕 강연을 하는 바람에(아마도 사모사 자랑인 듯) 나는 한참 오케이, 그레이트, 원더풀만 연발했다.

책을 읽으면 세상이 넓어진다. 15평 편의점이 15만 평쯤 확장된다. 시공을 넘나들며 다양한 직업과 경험, 인생관을 지닌 2백 개 나라 사람들과 금세 만난다. 어제는 ‘혼밥’에 대해 득도의 경지를 보여주는 일본 만화가의 에세이 ‘혼밥자작감행’을 읽으며 키득거렸다. 편의점 시식대에서 홀로 도시락과 컵라면을 먹는 손님들이 이제 예사로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은 뉴욕 브루클린 커피숍에서 일하는 바리스타 이미연씨가 쓴 ‘카운터 일기’를 읽으며 바다 건너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과 체온을 느끼는 중이다. 20이 두 번 들어가는 2020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도 편의점에서 스무 권의 책을 읽어야겠다. 지금처럼 조금씩 읽으면 충분하겠지. 해피뉴Book이어!

봉달호 작가·편의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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