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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비 사태’, 미성년자의 불공정 계약에 분노한 팬심





그리핀과 중국 징동게이밍이 작성한 합의서. 하태경 의원실 제공




‘리그오브레전드(LoL)’ 프로게임단이 19세 미성년자 선수에게 장기간 중국 이적을 강요했다는 의혹으로 e스포츠계가 발칵 뒤집혔다. 게임단 대표가 선수의 법정대리인인 부모와 논의하지 않고 이적을 추진했으며, 해당 선수를 협박했다는 의혹도 제기된 상태다.

LoL은 대한민국 부동의 1위 게임이다. 지난해 기준 국내 LoL 프로게임단 예산 규모는 모두 219억원이다. SK텔레콤 T1 소속 ‘페이커’(게임상 닉네임) 이상혁(23)은 야구, 축구를 포함해 국내 프로스포츠 선수 중 가장 많은 연봉을 받고 있다. 인센티브를 합쳐 50억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LoL은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인기가 있다. 세계선수권 격인 ‘LoL 월드 챔피언십’의 지난해 결승전 시청자 수는 9960만 명으로 조사됐다.

강압 이적 의혹 사건이 ‘e스포츠 종주국’을 자처하는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세계 e스포츠팬들도 주목하고 있다. 이 사건은 ‘카나비 사태’로 불린다. 중국으로의 장기 이적을 종용당한 프로게이머 서진혁(19)군의 게임 닉네임이 ‘카나비’여서 붙은 이름이다. 서군은 LoL 게이머들 사이에서 ‘초특급’ 유망주로 분류된다.

사건은 서군의 소속 팀인 ‘그리핀’의 전 감독 김대호씨의 폭로 방송으로 불거졌다. 김 전 감독은 지난달 16일 아프리카TV 등 개인방송을 통해 그리핀과 중국 게임단 징동게이밍(JDG)이 서군의 완전 이적을 추진하며 4년 이상의 장기계약을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서군은 소속 팀 그리핀을 떠나 JDG에서 임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 전 감독은 장기계약을 강요한 배경에 그리핀이 받게 될 500만 위안(8억3000만원 상당)의 거액 이적료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김 전 감독은 조규남 당시 그리핀 대표가 서군을 직접 협박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리그오브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LCK)’ 운영위원회는 문제가 불거진 지 하루 만인 지난달 17일 해당 사건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LCK는 한국 LoL 대회 1부 리그다. LCK 운영위는 지난달 29일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그리핀은 서군의 JDG 임대 과정에서 불공정 계약을 맺었다”며 “그리핀과 JDG가 완전 이적 과정에서도 부당한 장기계약을 체결하려 한 정황이 포착됐다”고 밝혔다.

서군은 애초 4년 이상의 계약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수 생명이 짧은 e스포츠업계 특성상 선수들은 장기계약을 기피한다. 장기계약 상황에서는 매년 연봉 인상도 쉽지 않다. LoL 제작사인 라이엇게임즈도 3년이 넘는 계약을 금지하고 있다.

논란이 이어지자 그리핀 측은 지난달 23일 서군을 자유계약(FA) 신분으로 풀어주겠다고 결정했다. 조규남 그리핀 대표는 지난 12일 대표직에서 사임했다. 다만 그는 같은 날 언론 인터뷰에서 서군에 대한 협박 의혹을 부인했다. 그러면서 “김대호 전 감독이 감독 시절 선수들을 상대로 폭언과 협박, 폭행했다”고 주장했다.

양측의 입장이 대립하며 상황은 ‘진실공방’으로 흘렀다. 그러나 서군이 지난 7월에 에이전시 ‘키앤파트너스’와 계약한 문건이 공개됐다(국민일보 11월 18일자 1면). 에이전트가 있었음에도 서군이 소속 팀의 강요에 ‘무방비’로 노출됐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서군의 에이전시는 그리핀에게 법률 자문을 해준 법무법인 비트와 사실상 동일한 회사라는 점도 논란이 됐다. 원칙적으로 금지된 ‘쌍방대리’ 정황, 에이전시가 선수보다 팀에 유리한 입장을 취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키앤파트너스는 이적 상황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클라이언트’인 서군과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LCK 운영위가 지난 20일 최종 조사 결과를 내놓자 여론은 악화됐다. LCK 운영위는 미성년자인 서군을 직접 접촉해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취지로 조규남 전 대표에게 ‘무기한 출장 정지’ 처분을 내렸다. 운영위는 김대호 전 감독에게도 폭언, 폭행을 이유로 같은 징계 조치를 했다. e스포츠 커뮤니티에서는 “사건의 시발점인 조 전 대표와 내부고발자인 김 전 감독의 징계가 어떻게 같을 수가 있느냐”며 “내부고발에 대한 보복성 징계”라는 반발이 나왔다.

서군의 ‘불공정 계약서’는 그 직후 공개됐다(국민일보 22일자 1면). 그리핀과 서군이 맺은 계약서에는 선수가 30일 이상 입원할 경우, 선수의 기량이 떨어질 경우 팀은 계약 해지가 가능하다고 돼 있다. 연락이 두절되면 팀은 선수와의 계약을 해지한 뒤 ‘5000만원+그간 지급한 모든 돈’을 청구할 수 있다는 조항도 담겨 있다. “완전한 노예계약” “어른들이 미성년자를 착취했다”는 등 커뮤니티에서 비판 여론이 폭발했다. 청와대 국민청원도 제기됐으며, 24일 오후 7시 현재 16만8246명이 동의한 상태다. 키앤파트너스는 관련 의혹에 대한 국민일보의 해명 요청 8시간 만인 지난 22일 오후 “팬들에게 사과드린다. 영업을 중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국민일보 23일 보도).

일부 전문가들은 ‘카나비 사태’로 ‘불공정’ 관행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분출됐다고 분석한다. LoL 팬들은 대부분 2030세대다. 서군의 처지를 자신의 상황에 빗대 공감하는 한편, 업계의 불합리한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이다. LCK에서 뛰고 있는 LoL 프로게이머의 평균 연령은 지난해 기준 20.8세다.

박대영 서울지방변회 e스포츠 동호회 부회장은 “카나비 사태에서 드러나는 기성세대의 모습이 현실과 너무나 닮아 있지 않느냐”며 “이런 일이 더 일어나선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장주 이락디지털문화연구소 소장은 “팬들은 자신의 사회적 상황이 서군과 비슷하다고 공감하는 것 같다”며 “팬들은 ‘내 말을 좀 들어 달라’는 심정이 아닌가 싶다”고 분석했다. 익명을 요청한 e스포츠업계 관계자는 “업계의 불공정한 처우나 계약내용이 과거 초창기 시절의 관행에 맞춰져 있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문동성 이다니엘 기자 theM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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