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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박상익] 한글, 국어학자 전유물 아니다



노벨 문학상, 하면 우리는 으레 시와 소설을 떠올린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도 당연히 시인, 소설가 등 작가들일 것으로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토마스 만(1929), 헤르만 헤세(1946), 오에 겐자부로(1994)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작가들만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아니다. 역사학에서 윈스턴 처칠(1953)과 테오도르 몸젠(1902)이, 철학에서 루돌프 오이켄(1908), 앙리 베르그송(1927), 버트런드 러셀(1950)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4권에 이르는 방대한 ‘케임브리지 영문학사’(1927년 초판)에는 셰익스피어, 존 밀턴과 나란히 에드워드 기번(역사학), 토머스 홉스, 존 로크, 데이비드 흄, 벤담과 공리주의자들(철학), 에드먼드 버크(정치학), 애덤 스미스(경제학) 등이 소개되고 있다. 시와 소설만이 문학이 아니란 말이다. 아마도 이게 글로벌 스탠더드에 가까울 것이다. 과연 우리 ‘한국문학사’에도 이런 광폭 행보가 있었던가 싶다.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의 범주가 너무 협소한 것 아닐까. 우리의 협소함이 문학에 국한된 것일까.

며칠 전이 한글날이었다. 이맘때 언론은 매년 해오던 낡고 진부한 프레임을 되풀이한다. 외국어 사용을 줄이자, 찌아찌아족 한글 사용, 아름다운 한글 디자인, 한글을 사랑하는 외국인 등 틀에 박힌 동어반복이 수십 년째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한글에 대한 이런 식의 찬양만으로 세종대왕의 후손으로서 의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요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반민족주의나 탈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 있다. 그들은 민족주의를 ‘상상의 공동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한다. 필자는 에라스무스의 세계주의, 보편주의를 지지하지만 동시에 한글민족주의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한글민족주의자인 필자는 한글의 언어학적 측면에만 주목하는 국어학자들의 협소한 프레임에서 한글을 일단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한글은 국어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글은 ‘언어학’의 협소한 프레임에 가둬 두기에는 너무나 크고 값진 우리의 자산이다. 언어학적 우수성만 찬양하면 그걸로 할 일을 다한 것이 아니다. 한글을 기반으로 한 원대한 국가 전략과 민족사적 미래비전이 필요하다. 더 큰 상상력이 요청된다.

시인 김수영(1921~68)은 1930년 이후 태어난 신세대 문학청년들을 ‘뿌리 없이 자라난 사람들’이라고 혹평하곤 했다. 일제 강점기 중학교육을 받지 못해 일본어를 읽을 줄 모르는 까닭에 세계문학의 흐름에서 차단된 그들에게 가장 결핍된 것은 ‘지성’이라는 것이다. 그는 산더미같이 밀린 외국 고전을 번역해 한글 콘텐츠를 일본어 못지않게 늘리는 일이야말로 국운(國運)에 관계되는 문제라고 질타했다. 그렇다. 김수영의 시대로부터 반세기 넘게 지난 지금도 핵심은 ‘콘텐츠’이며 ‘번역’이다.

한글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얼마나 될까. 영어권의 5%나 될까. 모국어로 세계 수준의 지식을 접할 수 없다면 그걸 어디 제대로 된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5000만(북한 포함 7000만) 인구를 거느린 민족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지난 9일 한글날, 문재인 대통령은 한글을 갈고 닦는 일이 나라의 힘을 키우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불필요한 외국어 사용을 줄이자고 했다. 국어학자들이 만든 ‘언어학 프레임’에서 한 치도 못 벗어난 구태의연한 훈화다. 민족이상의 결여다.

우리에게 당장 시급한 과제는 한글을 협소한 언어학 프레임에서 끌어내어 웅대한 상상력을 불어넣는 일이다. 만일 세종이 지금 다시 온다면, ‘한글 갈고닦기’ 타령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게으름을 엄히 꾸짖을 것만 같다. 당장 대대적인 번역 사업에 착수하라고 호통칠 것만 같다. 세종이 최고의 문자 한글을 발명했다면, 우리는 그 한글에 최고의 콘텐츠를 채워 후손에게 전달할 책임이 있다. 한글로 세계를 읽게 하자.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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