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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탐사] “아빠가 짊어졌던 삶의 무게, 무겁지만 안고 일어서야지요”

지난 10일 병원 치료를 받은 뒤 나온 A씨를 만났다.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의 유족인 그는 국민일보와 만나 아픔을 극복하는 과정을 이야기했다. A씨는 “누가 손을 잡아주길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손을 내민다면 도움을 주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다. 권현구 기자




한국사회 잔혹극 ‘살해 후 자살’ ⑤

‘언제 오니?’ 여느 토요일, 집에서 보낸 아빠의 문자로 그날이 시작됐다. 몇 시간 후 간다는 답장을 보냈는데, 얼마 뒤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했다.

오빠는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목에 붉은 선 자국이 보였다. 엄마는 오빠를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다. 아빠는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바람을 쐬고 오겠다”며 집을 나섰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실종신고를 했는데 아빠가 미리 써 둔 유서가 집에서 발견됐다. 그리고 이틀 후 “아빠가 고속도로 졸음쉼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길은 치매가 심해진 할머니를 모신 요양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빠는 진작부터 오빠의 목을 조르고 자신도 죽으려 계획했었던 것이다.

그 뒤로 계절은 몇 차례 바뀌었다. “근데…, 아빠가 없는 게 더 힘들어.” 오빠는 어느 날 식탁에서 아빠의 부재에 대한 감정을 힘겹게 털어놨다. 좀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그였다. 날 때부터 자폐를 앓았던 오빠는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지내 왔다. 그런 그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아빠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지 가늠이 어려웠다. 그날 이후 부쩍 야윈 그를 보고 ‘힘들구나’ 짐작만 해왔다.

오빠는 평소에도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선 반나절 이상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시간이 점차 늘어갔다. 얼마 전엔 자기도 견디기 어려웠는지 그렇게 싫어하던 병원에 가야겠다는 말을 스스로 꺼냈다.

“저도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그래요. 그런데 오빠도 똑같은 사람이니까, 장애인이지만 그런 감정이 있을 것 같아요. 오빠도 그 사건으로 힘들어하는 거 같다고 생각해요.”

지난 10일 만난 A씨는 이렇게 그 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금방 눈물이 떨어져 이야기가 끊기고 다시 하기를 반복했다. 그의 가족은 자책감, 원망, 그리움이 뒤엉킨 계절들을 보냈다. 아빠의 죽음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아빠가 견디고 있었던 가장의 무게는 고스란히 A씨에게 옮겨왔고 오빠는 정신질환이 더 악화됐다. 그 역시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지독한 외로움의 시간을 보냈던 엄마는 요새 “날이 추우니까 아빠(남편)가 더 생각난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래도 그는 “어느 순간 무너질 것 같기도 하지만 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A씨는 “(아빠의 행동은) 평생 안고 가야 하는 일이고,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그래도 살고 싶다”며 극복의 시간을 이야기했다.

누구나 짐작하는 것처럼 그 사건은 깊게 파인 상처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평생 안고 살아야 할 일”이라는 게 A씨의 고백이다. 이런 종류의 사건은 일반 자살 사건보다 더 큰 트라우마를 안긴다. 그러나 혼자서 끙끙 앓고 견디기만 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힘들다는 말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으며 삶의 의지를 키워가고 있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억을 안고 있는 그의 이야기는 결국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국민일보는 미성년 자녀의 경우 트라우마를 다시 건드릴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아픔을 극복 중인 성인 유족을 대상으로 지난달 24일과 지난 10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관련 상담기관과 유족의 동의를 구했다.

아빠는 엄마와 함께 작은 가게를 운영했었다. 그러나 몇 년 전 지역이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장사를 접고 집에만 있었다. 오빠의 증상은 차도가 없었다. 그래서 아빠와 엄마, 오빠는 하루 종일 집에 붙어 있었다. 병 때문에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던 오빠는 외출하고 돌아온 날에는 유독 더 화를 냈었다. 아빠는 이따금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았을 뿐 오빠를 집 안에서만 끌어안고 살았다. 수입이 없었고 오빠의 상태는 갈수록 악화됐지만 아빠는 내색하지 않았다. 우울감이 집안을 가득 채웠다.

“우리 가족은 힘든 걸 말 안 해도 서로 다 알았어요. 하지만 서로 힘들어서 아빠의 힘듦을 외면했던 것 같아요.” A씨가 아빠의 자리로 들어가면서 알게 된 건 당신이 짊어졌던 책임의 무게였다.

아빠는 그 일이 있기 3개월 전에도 유서를 썼었다. 당시 유서에도 ‘오빠랑 내가 죽는 것만이 우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엄마랑 행복하게 살아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A씨는 “당시에는 아빠가 행동에 옮기실 거라곤 전혀 생각 못 했어요. 그런 아빠에게 저는 ‘나쁜 생각하면 안 돼. 강하게 마음 먹어야 해’라고 했어요. 아빠를 공감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거죠”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날 이후 자책감이 가족을 괴롭혔다고 했다.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오빠에게도 그 사건은 충격이었다. 가끔 오빠는 식탁에 앉아 “아빠가 없어서 힘들다”는 말을 중얼거린다. 어떤 때는 “내가 말을 잘 안 들어서, 말썽 피워서, 소리를 질러서 아빠가 그렇게 됐다”고 자책하기도 한다. 아빠의 그 일은 고스란히 병세에 새겨져 그의 우울감이 깊어졌다. “오빠에게는 ‘비가 많이 오는 날 차를 몰고 할머니를 보러 가다가 빗길에 미끄러져 돌아가셨다’고 말했어요. 아빠가 오빠랑 같이 가려고 했다는 건 말할 수 없었으니까….”

자책의 삶을 바꾼 건 아빠의 유품이었다. A씨는 그 사건이 있고 아빠의 짐을 정리하다가 쇼핑백 하나를 발견했다. 아빠가 극단적 선택을 앞두고 정리한 물품들이었다. 쇼핑백에는 몇 해 전 생일선물, 정신장애인 가족 자조 모임에서 받은 자살 예방교육 수료증, 귀중품 등이 있었다. 살아야 할 이유들을 모아 두며 자신을 다잡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빠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외로운 줄타기를 했던 듯했다.

“아빠도 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생각해보면 마지막 순간에는 아빠도 후회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순간을 붙잡지 못한 게 후회돼요.”

A씨는 그래서 남은 가족과 힘을 내보기로 했다. A씨는 직접 심리부검센터에 도움을 요청했고 상담치료도 시작했다. 자조 모임에도 나갔다. 이 과정에서 그 일은 가족이 자책할 일이 아니라는 설명도 들었다. 현실로 닥친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기 위해 관할 구청, 주민센터에 직접 메일을 보내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나섰다.

A씨는 구청에 도움을 요청하는 문턱에서 좌절한 적도 많았다. 그는 “개방된 민원창구에서 제 아픈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게 너무나 힘들었어요.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들이 도움을 편하게 청할 수 있는 전용 부스가 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까다로운 절차와 복잡한 서류 양식에 좌절하면서 왜 아빠가 정부 지원을 받는 걸 포기했는지 깨닫기도 했지만, A씨는 있는 힘껏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A씨 엄마도 홀로서기를 준비하고 있다. A씨는 엄마가 자살 유가족 모임과 정신장애인 가족 자조 모임에도 참여하도록 했다. 비슷한 아이를 키우는 또래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아픔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과 함께 치유도 하고 있다. 사회활동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엄마는 모임을 통해 세상에 한 발짝 나서는 연습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고용노동부 워크넷을 통해 구직활동도 하고 있다.

인터뷰 내내 그의 심경은 복잡해 보였다. 그리움은 자책감으로, 때로는 원망이라는 감정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아빠나 가족, 그날 일과 지금 상황에 대한 생각이 수시로 바뀌는 듯했다.

“찾아보면 도움을 받는 곳도 있었을 텐데 아빠가 극단적으로 간 게 원망되기도 해요. 아빠가 모든 문제와 상황의 희생양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우리와 같이 살면서 극복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드는 거죠.”

“만약 아빠가 오빠를 데리고 갔다면 더 큰 슬픔에 갇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오빠가 살아 있으니까 미워도 하고 원망도 하지만 고인이 되면 그렇게 할 수 없잖아요.”

“오빠는 한없이 불쌍한 사람이에요.”

그러나 A씨는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키우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가족 살해 후 자살 위기에 놓인 사람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도 했다. “아빠가 그러셨듯 죽기 직전 후회한다는 생각이 들어도 일단 선택을 하면 돌아갈 수 없잖아요. 그 마지막 선택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의 빈자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 사회에서 ‘남겨진 것 같은 초라함’에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거든요.”

김유나 정현수 임주언 기자 spr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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