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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역사여행] “사탄 세력, 주님 힘으로 물리친다”… 전도부인, 다이너마이트 품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현 시국을 성토하는 태극기집회가 열리고 있다. 이 자리는 1905년 10월 21일 을사늑약 체결 소식이 알려지자 전도부인이자 이화학당 교사였던 조신성이 이튿날 학생들과 함께 구국기도회를 열었던 곳이다(아래 당시 사진). 조신성은 훗날 무장 항일독립투쟁을 벌인다.


조신성의 이화학당 사감과 교사 시절 이화학당 학생들.


조신성 (1873~1953)


이화학당이 보이는 서울 정동교회와 정동길.


월남 후 부산 신망애양로원에서의 조신성 말년 모습.


정동교회 옆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비와 참배객들.


모르고 걸으면 산책이고, 알고 걸으면 공부다. 오래된 도시 서울은 숱한 역사 이야기를 안고 있다. 사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그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진다. 한국기독교역사도 예외 아니다. 1885년 제물포에 도착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그보다 한 해 앞서 중국에서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입성한 선교사 알렌 등의 선교 목적지는 조선의 수도 한양이었다. 그 조선말 한양은 개화 여부를 두고 두 패로 나뉘어 혼란에 빠졌다. 일본 등 외세는 그 틈새를 파고들었다. 그 충돌의 지점이 서울 덕수궁 대한문이다. 문 앞은 근현대사의 ‘만인소(萬人疏)’ 광장이기도 하다.

지난 주말이었다. 대한문 앞은 시위대가 점령했다. ‘태극기 부대’ 집회 대형 깃발이 나부끼고 그들이 사용하는 고성능 확성기 소리가 일대를 압도했다. 덕수궁에 들어가려는 외국인 관광객 등이 겁먹은 표정으로 빠르게 경내로 들어갔다.

이화학당 학생들과 을사늑약 반대

1905년 10월 21일 밤.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이 일본에 의해 강제체결된다. 조병세 등 백관들이 “대궐 섬돌에 머리를 박고 죽을지언정 결코 조약에 찬성할 수 없다”고 버틴 것도 허사였다. 박제순 이완용 등 매국노들이 밀어붙였다. 민영환 조병세 등은 자결로 저항했다. 이튿날부터 군중은 대한문 앞으로 모였다. 분노에 찬 백성들로 인산인해였다.

그 군중 가운데 흰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입은 교사의 인솔 아래 어린 학생 100여명이 엎드려 통곡했다. 일고여덟 살 아이에서 십오륙 세 처녀들까지 섞여 있었다. 그들은 덕수궁 뒤편 이화학당의 교사 조신성(독립운동가)과 그의 학생들이었다.

“여러분 조선은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원수 마귀와 대적하며 임금을 지킬 것입니다. 기도로 이 나라를 지킬 것입니다.”

흐느낌 가운데 카랑카랑한 조신성의 목소리가 군중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집회를 마친 후 그들은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학교로 돌아갔다. 정동교회를 지나면 학당과 기숙사가 있었다. 그날 이후 조신성은 매일 오후 3시 구국기도회를 열었다. “주님의 힘으로 사탄의 세력을 물리쳐 달라”고 간절히 구했다.

평북 의주 출생인 조신성은 축복받지 못했다. 조씨가문 대를 이을 사내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금강산에 들어가 방랑했으므로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가 스물네 살 되던 해 이화학당에 찾아온 것이 마지막이었다. 어머니는 그가 아홉 살 때 독사에 물려 죽었다. 그는 무남독녀로 조부모와 고모 밑에서 성장했다.

그는 열여섯 살에 고모 손에 이끌려 전혀 알지 못하는 남자와 결혼했다. 그런데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조신성 연구학자 윤정란은 “사업을 하던 그의 남편이 가산을 탕진한 후 아편을 먹고 자살했고, 이후 의탁할 곳이 없던 조신성은 당시 의주 선교를 하던 베어드 등에 의해 신앙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젊은 과부는 위험했다. 밤중에 누가 납치해도 그것을 관습으로 여기던 시대였다. ‘여호와께서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시 146:9)는 야소교는 수많은 조선 여인들의 피난처가 됐다. 그렇게 환난을 피한 이들과 조신성 등은 전도부인이 됐다.

조신성은 사경회, 부흥회, 성경반 등에 참석하면서 자신을 성찰해 나아갔다. 그리고 좀 더 넓은 곳에서 교육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에 들어가 제물포로 가는 배를 타고 서울 상동교회로 향했다. 전덕기 목사 등이 설립한 교회 내 사숙 공옥학교에 다닌 것으로 보인다. 이화학당 설립자 메리 스크랜턴은 그의 똘똘함을 보고 학비를 대주고 이화학당 고등 과정을 밟게 했다.

조신성은 이화학당과 민족기독교의 산실 상동교회를 오가며 교사, 사감, 부인회와 청년회 간부 등의 일을 했다. 활달했고 도량이 넓었다. 종로상품진열관과 국채보상운동 실무자로도 활동했다. 상동파 기독교 애국지사들은 그를 기독교 여성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요코하마성경학교 진학을 권했다.

그렇게 신학을 공부하고 온 조신성은 부산 규범학교 교사를 거쳐 여메례 안창호 등과 함께 평양 진명학교 교사로 나서 기독교 교육에 앞장선다. 동시에 항일 여성단체 근우회 평양조직을 이끌며 공창 폐지, 부인 직업 갖기, 미신타파, 부인 교양 함양 운동 등을 전개한다. 평양은 복음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는 조선의 손꼽히는 여성기독교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는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장이 돼 기독교 애국지사들과 항일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1930년대를 전후해 일경의 탄압이 심해지자 평남 맹산을 거점으로 동지를 규합, 상해임시정부를 돕는 무력 투쟁을 벌인다. 무기밀수와 군자금 확보, 격문배포 등으로 서북을 호령했다. ‘맹산독립단’하면 조신성이었다. 가슴에다 육혈포, 탄환, 다이너마이트를 품고 투쟁하던 혁명가였다.

양로원에서 숨진 뒤 공동묘지 묻혀

그러면서도 자신이 받았던 예수의 사랑을 잊지 않아 평양 고아원 설립을 위해 건축모금에 앞장서는가 하면 고육원(苦育院)을 열어 사회사업가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평양형무소를 출옥한 그는 “알면서도 조선을 걱정하지 아니하는 사람, 의롭지 못한 일을 행하는 자는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살아남아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북한은 공산당 박해의 땅이 되고 말았다. 1945년 11월 27일 밤 그가 월남하며 말했다. “공산당은 내 동포가 아니야. 공산당이 무슨 사람이야. 한 사람이라도 제정신 가진 놈이 남아 있어야 내 동포”라고 외쳤다.

하지만 남한이라고 독립운동가 조신성을 받들지는 않았다. 친일세력이 여전히 권력을 휘둘렀다. 분노가 그를 쇠약하게 만들었다. 자식도 없던 그는 병든 몸을 의지할 데가 없었다. 규범학교 교사 인연이 있던 부산 신망애양로원에서 지내야 했다.

신앙으로 거듭났던 그리스도인 여성독립운동가 조신성. 그는 6·25전쟁 휴전협정을 앞둔 1953년 5월 양로원 뒤편 공동묘지에 묻혔다.

글·사진=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1895년 ‘과부’가 됨
·1897년 평북 의주읍교회에서 신앙인 됨
·1897년 이화학당 입학
·1905년 을사늑약 반대 구국기도회
·1907년 국채보상운동
·1908~1910년 요코하마성경학교 수학
·1911~1918년 평양 진명학교 교장
·1920년 맹산독립단 총 참모·체포 실형
·1927~1930년 근우회 활동
·1945~1948년 대한부인회 부총재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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