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달팠던 그 시절 만인이 사랑한 ‘스크린 신사’ 김진규







배우 김진규를 하나의 수식어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1960년 한 해에 출연했던 영화들만 봐도 사정은 짐작된다.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에 김진규는 맏사위로 출연한다. 그런가 하면 김기영 감독의 ‘하녀’에서는 두 자녀를 둔 가장으로 출연하고 또 강대진 감독의 ‘박서방’에는 맏아들로 출연하기도 한다. 김진규가 23년생이니 당시 우리나라 나이로 서른여덟 혹은 서른아홉이었을 테다. 나이로 보자면 ‘하녀’의 두 아이 아버지가 적당했지만 그는 당시 맏아들, 맏사위처럼 청장년으로 종종 등장했다. 겨우 네 살 많은 김승호가 줄곧 쉰이 넘은 아버지 역할을 맡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50년대와 60년대 영화에서 김진규는 그 시대 청장년의 역할을 두루 소화해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영균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남성 역할은 아니었고, 후배인 신성일처럼 반항적 청년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전쟁 영화에서는 전쟁의 상흔을 몸과 마음에 입은 자로 등장했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는 친구의 아내를 연모하지만 말 못하는 노총각이었으며, ‘서울의 지붕 밑’에서는 이웃집에 사는 서글서글한 산부인과 의사로 출연한다. 말하자면 그는 맏아들과 맏사위처럼 정 많고 믿음직한 가족 구성원에 적합했고 산부인과 의사나 선생님처럼 지적이면서도 예의를 갖춘 청년으로도 잘 어울렸다.

아내 김보애는 남편을 추억하는 논픽션 ‘내 운명의 별, 김진규’에서 그를 가리켜 스크린의 신사라고 불렀다. 김보애의 말처럼 김진규는 미남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따뜻하고, 진중한 분위기를 가진, 신뢰감 있는 배우였다. 많은 여성 관객에게 의지할 수 있는 신사로 추앙받았던 것이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뽑은 한국영화 100선 중 김진규의 이름이 가장 많은 작품에 거론되는 이유도 이와 멀지 않다. 데뷔작인 55년 ‘피아골’에서 시작해 75년 ‘삼포 가는 길’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 100선 중 무려 20작품에 그가 출연했다. 김진규는 어떤 하나의 이미지로 소비된 배우가 아니라 생물학적 나이나 지역색에 무관하게 다양한 이미지로 유통되고, 역할을 소화해낸 배우였다.

한국영화 100선 중 20개 출연

김진규는 무엇보다, 60년대 영화계의 흥행 스타였다. 신상옥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영화들이 특히 그렇다. 61년 최은희와 함께 주연을 맡은 ‘성춘향’은 당대 최고의 흥행작에 등극했다. 지금 보자면 사십 줄의 나이에 댕기 머리를 한 이몽룡의 모습이 어색하기도 하지만 김희갑 허장강 콤비의 가볍고 코믹한 면과 균형을 이뤄 진중하고 점잖은 김진규의 이몽룡이 더 신뢰감 있는 앙상블을 제공했다.

같은 해 최은희와 주연을 맡은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역시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아마 김진규에 대해 현재까지도 가장 잘 알려진 배역이 바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하숙생 아저씨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극 중에선 그는 당대의 세속 윤리를 넘어서지 못한 채 정념과 윤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선량한 남자를 특유의 태도와 몸짓으로 보여주었다. 옥희의 귀여운 도발에 낯을 붉히고, 연모하는 여성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그의 모습은 점잖은 로맨티시스트의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신상옥 감독 연출, 최은희 김진규 동반 출연은 어떤 점에서 60년대 초반 영화의 흥행 공식이라고 말해도 될 듯싶다. ‘동심초’(1959) ‘이 생명 다하도록’(1960) ‘서울의 지붕 밑’(1961) ‘로맨스 빠빠’(1960) ‘벙어리 삼룡’(1964) 등에서 두 사람은 주연급이든 조연급이든 커플로 등장해 인기를 누렸다. 당대 관객과 대중이 가장 바라 마지않던, 이상적 커플의 모델이 바로 김진규-최은희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작가주의 감독의 페르소나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매체에서 진행 중인 한국영화 100선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작품 중 김진규의 주연작이 유독 많은 것은 김기영 김수용 유현목 이만희 등 한국 영화사의 작가주의 감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감독들의 작품에 그가 출연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김진규의 주연 작품 중 60년대와 70년대의 한국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참조사항이 되는 작가주의 감독의 작품과 겹치는 부분이 상당하다. 소위 ‘가께모찌’라 불리던 겹치기 출연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적 날인을 남기고 싶어 했던 당대의 감독들에게 있어 김진규는 필연적 배우로 인식되었던 듯싶다.

현대 한국영화사에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의 동식이 그렇다. 심리스릴러이자 공포, 사회극 등 다양한 해석을 열어주는 ‘하녀’에서 동식은 문제의 시작이자 끝인 ‘남자-남편-아버지-가장’의 역할을 해낸다. 그는 진지하면서도 신사적인 중산층 남성으로서 욕망과 유혹에 무너져 내리지만 한편 그 대가로 혹독한 공포에 시달리는 다층적 캐릭터를 연기해낸다. 이 위태위태한 상징과 끊어질 듯한 긴장 속에서 그는 화자이자 주요 배역으로 이야기의 무게 중심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을 원작으로 한 유현목 감독의 작품 ‘오발탄’(1961)도 빼놓을 수 없다. 김진규는 반항적이면서도 서늘한 영호(최무룡)와 대조적으로 책임감에 짓눌린 사색적 장남의 모습을 보여준다. 병원으로, 경찰서로, 노모가 계신 집으로 행선지를 정하지 못한 채 택시에 갇힌 송철호. 지독한 치통에 시달리며 일그러진 철호의 얼굴은 배우 김진규의 얼굴에 남은 전후 한국의 현실이었다. 김진규는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1962) ‘잉여인간’(1964) ‘순교자’(1965) 등에도 출연하며 그의 페르소나로서 활약했다.

장년이 되어 출연한 ‘삼포 가는 길’(이만희·1975)의 정씨 역시 시대의 얼굴이다. 여러 가지 기술을 다 가르쳐 주는 ‘아주 큰 집’에서 살다 나온 정씨는 백화나 영달과 달리 찾아갈 고향을 가진 자로 등장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 10년 동안 가보지 못했던 고향이 상전벽해를 이뤄 이제 섬이 아니라 육지가 되었다는 말에 망연히 창밖을 내다보는 그의 눈빛은 이만희 감독이 ‘삼포 가는 길’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상실의 순간을 응집해 보여준다.

김수용 감독의 문제작인 ‘어느 여배우의 고백’(1967)에 배역 김진규로 출연한 김진규도 반드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초라한 복장의 김진규가 대도시를 배회하고 있다. 그때 몇몇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심지어 어떤 여고생은 “저 사람 김진규씨 아니야? 왜 이렇게 초라해졌니? 그래도 우리 엄마는 저 사람의 열렬한 팬이란다”라며 비아냥거린다. 여고생들의 조소를 들으며 김진규가 고개를 떨군 채 스크린을 벗어난다. 김수용 감독의 자기반영적인 영화 ‘어느 여배우의 고백’에서 김진규는 한때 한국영화의 중심이었으나 어느새 영화판에서 소외당한 채, 멀어져 버린 자신을 연기한다. 영화계에서 거의 폐기처분된 그는 존재를 몰랐던 딸, 남정임을 여배우로 성장시키며 영화에 대한 애정을 거두고자 한다. 어쩌면, 이는 영화 속 배우 김진규에 투사된 진짜 김진규의 꿈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끝내 실패한 제작자의 꿈

배우 김진규의 마지막 꿈은 아마도 제작자·기획자로서의 영화인 김진규였던 듯싶다. 김진규는 아내인 김보애와 신영균 주연의 영화 ‘종자돈’(1967)을 기획하고 연출했지만 세간의 반응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의 표현을 빌자면 ‘얼굴에 분칠해 번 돈’을 전부 쏟아부어 제작했던 ‘성웅 이순신’(이규웅·1970)에서 주연과 제작을 도맡았다. 그러나 이마저도 흥행에 실패했고, 집념으로 ‘난중일기’(장일호·1977)도 제작했으나 두 아들까지 함께 출연했던 이 영화 역시 흥행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거듭된 투자와 실패로 인해 60년대 영화계의 대스타였던 김진규는 경제난을 겪게 되고 이에 김보애와의 결혼 생활까지 끝내게 되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영화 ‘어느 여배우의 고백’ 속 초라한 김진규의 마지막이 현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총 296편의 출연작 중 60년대에 총 205편의 영화를 남긴, 말 그대로 60년대의 배우 김진규는 골수암 투병 끝에 98년 6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김보애 사이의 자녀들 중 2014년 세상을 떠난 딸 김진아가 배우로 활약했으며, 막내아들 김진근은 여전히 배우로 활동 중이다.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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