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진 배우 ‘최은희’… 한국 영화사의 거의 전부

130여편의 영화에서 팔색조의 연기를 펼치며 1960년대 한국영화의 얼굴이 된 배우 최은희. 국민일보DB
 
전 남편이자 영화적 동반자였던 신상옥 감독과 함께한 모습. 최은희와 신 감독은 1978년 납북돼 북한에서 8년간 17편의 영화를 제작했고, 1986년 탈북에 성공했다. 한국영상자료원
 
단아하고 정숙한 젊은 미망인으로 분한 출세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극 중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30대의 성춘향을 연기해 당대 최고 흥행을 기록한 ‘성춘향’의 극 중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페르소나(persona)’는 고대 그리스 배우들이 쓰는 가면을 지칭했다. 배우는 살아가면서 3개의 페르소나를 가질 수밖에 없다. 유명 인사이자 대중적 스타로서의 페르소나, 극 중 역할로서의 페르소나, 마지막으로 실제 삶을 영위해야 하는 관계 속에서 아내, 남편, 딸, 자식과 같은 사회적 호명의 페르소나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은희야말로 다양하며 중층적인 페르소나를 가진 배우라고 할 수 있다. 최은희는 영화감독 신상옥의 페르소나였으며, 1960년대 한국 영화사의 페르소나였고,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상처 입은 한국사의 페르소나이자 한국적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판타지를 고스란히 구현한 여성 페르소나이기도 했다.

페르소나 최은희

최은희는 스타로서 130여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고, 양공주에서부터 바걸, 대학생, 미망인, 어머니로 출연하기도 했으며,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여성 캐릭터 중 하나인 성춘향을 연기하기도 했다. 최은희는 직접 네 편의 영화를 연출한 한국의 세 번째 여성 영화감독이었다. 그러면서 한 남자와 두 번 결혼하기도 했던 여성이었으며, 자신이 직접 낳지 않은 네 명의 아이를 키운 어머니이기도 했다.

배우 최은희를 구성하는 이 다양한 페르소나는 한국사의 질곡과 100년 한국 영화사, 그리고 한 명의 여성으로서의 삶을 역동적으로 오가며 생성된다. 영화 속 캐릭터가 최은희의 일부이지만 전부일 수 없듯이 영화 밖의 삶 역시도 폭넓은 궤적 위에 놓여 있다. 한국 영화사의 거의 전부이자 대명사이기도 하지만 한편 결코 보편화될 수 없는 구체적이며 독특한 삶을 살아온 배우, 그가 바로 최은희이다. 한국 영화사의 페르소나 최은희 말이다.

여배우: 최은희

여배우 최은희는 신경균 감독의 영화 ‘새로운 맹서’를 통해 태어났다. 최은희의 본명은 최경순이었는데, 박화성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의 이름 ‘은희’가 워낙 강렬해서 그 이름을 본떠 스스로 개명했다고 한다. 박화성의 본명도 ‘경순’이었다고 하니 우연치고는 그 인연이 깊다.

1926년 11월 9일 최은희는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맞은편의 두메마을 경기도 초월면 지월리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최은희, ‘최은희의 고백’, 랜덤하우스, 2007).

최은희는 연극배우 문정복(배우 문정숙의 언니)의 소개로 극단 아랑에서 연기 수업을 시작했다. 1947년 ‘새로운 맹서’로 데뷔한 후 ‘밤의 태양’(박기채·1948) 등의 영화에 출연한다.

최은희는 1949년 함세덕의 희곡 ‘동승’을 원작으로 한 영화 ‘마음의 고향’(윤용규)에서 젊은 미망인 역할을 맡아 단아하고도 비극적인 이미지로 주목을 끌게 된다. 비록 20대 초반의 나이였지만, 아이와 남편을 잃고 어린 동승을 보며 애끓는 모정을 연기한 그 모습이 관객의 뇌리에 깊이 남은 것이다. 한국의 여인상이라는 이 이미지는 이후 ‘동심초’(1959)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열녀문’(1962) ‘벙어리 삼룡이’(1964) ‘민며느리’(1965)와 같은 대표작에서도 고스란히 재확인된다.

1954년 다큐멘터리 영화인 ‘코리아’에 출연하며 감독 신상옥과 만난 최은희는 ‘꿈’(1955) ‘지옥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과 같은 작품을 연달아 찍으며 배우로서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여배우 최은희의 인생에 있어 특히 1961년은 기억해야 할 해임에 분명하다. 1961년 최은희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출연하며, 어린 딸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젊은 미망인의 아름다움과 남편의 친구에게 연정을 느끼면서도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으로 욕망을 누르고 살아가는 ‘정숙한 어머니’로서의 상징성을 구축해낸다. 한편 ‘상록수’에서는 브나로드 운동에 매진하는 계몽적 여성 지식인을 연기하며 세련된 교양을 갖췄으나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희생적 여성으로 분한다.

무엇보다 기억할 만한 사건은 ‘성춘향’의 엄청난 대중적 성공이다. 당시 신상옥 감독이 연출하고 최은희가 주인공을 맡았던 ‘성춘향’은 홍성기 감독, 김지미 주연의 ‘춘향전’과 본격적인 대결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성 주연인 영화인만큼 김지미와 최은희의 대결이 주요 관심사였다. 김지미가 당시 10대 춘향임을 강조했던 데 비해, 최은희는 원숙한 30대에 성춘향 역할을 맡았으니 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 ‘성춘향’은 당시 36만1000명의 관객을 모아 역대 최다 관객 동원 영화로 기록됐다. 이 기록은 1968년 ‘미워도 다시 한 번’이 36만2000명 관객을 동원하고 나서야 깨졌다.

‘성춘향’의 성공과 1960년대 영화 정책의 영향으로 최은희는 1960년대 내내 말 그대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폭군연산’(신상옥·1962) ‘로맨스 그레이’(신상옥·1963) ‘빨간 마후라’(신상옥·1964) 등 한국 영화사의 대표작이자 최은희의 대표작들이 당대에 만들어졌고 남편인 신상옥 감독 역시 어마어마한 편수의 영화들을 제작하게 된다.

수상 실적도 주로 이 시기와 겹친다. 1959년 ‘어느 여대생의 고백’으로 우수국산영화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1960년 ‘동심초’로 우수영화상 여우주연상, 1961년 ‘로맨스 빠빠’로 최우수영화상 여우주연상, 1962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 같은 해 ‘상록수’로 제1회 대종상 최우수 여우주연상, 1966년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로 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 1965년 ‘민며느리’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명실상부한 전성기를 누린다.

영화인 최은희

뇌리에 각인돼 있는 배우 최은희의 이미지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등장하는 교양 있고 단아하고 정숙한 젊은 미망인의 모습이다. 하지만 사실상 최은희는 서구적인 이목구비와 몸매를 가진 배우였으며, 실제 매우 넓은 연기폭으로 다양한 연기를 소화한 배우이기도 했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과 ‘로맨스 빠빠’에서는 엘리트 여대생과 대학 졸업생 역할을, ‘로맨스 그레이’에서는 권태기에 빠진 유부남의 정신을 쏙 빼놓는 바걸을 연기했고, ‘저 눈밭에 사슴이’(정소영·1969)에서는 복부인 역할을 했다.

최은희는 그저 ‘다소곳한 한국적인 여인상’(조선일보, 1966년 9월 16일자)의 배우만이 아니라 “서글서글한 우리의 연인이요, 누이요, 어머니 같으면서도 때로는 매섭고 강한 분위기로 역사상의 여걸이나 또는 요부의 여인상을 부각”(김수남)하는, 다양한 매력의 배우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면모는 바로 신상옥 감독이 연출한 ‘지옥화’(1958)에서의 팜 파탈 연기이다. 같은 해 출연했던 영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에 등장하는 세련되고 무엇보다 양심적인 여대생의 모습과 달리 ‘지옥화’의 소냐는 매우 이기적이면서도 유혹적이다. 소냐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그것을 성취하고자 한다. 원하는 것을 갖고자 당대 도덕을 넘어서는 최은희의 모습은 매혹적인 성적 기표로 화면을 압도한다. 당대 관객에게는 거절당했으나 현대 영화 연구를 통해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격동기의 한국인, 여자, 최은희

한국전쟁 당시 이미 배우였던 최은희는 인민군과 국군 사이에서 고초를 겪었음을 술회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기, 남북 분단, 납북과 탈출 망명과 같은 만만치 않은 삶의 여정을 최은희는 배우로서, 여성으로서 거쳐 왔다. 그녀는 한편 신상옥의 아내이기도 했다. 결혼 생활은 대개 평탄했지만 아이가 없어서 늘 루머에 시달려야 했고, 이혼 당시엔 세기의 스캔들의 일부로 소비되기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은희는 모두 네 편의 영화(‘민며느리’(1965)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 ‘약속’(1984))를 연출한, 한국 영화사상 세 번째 여성 감독이었다. 아울러 신필름 연기실을 운영하며 안양예술학교의 교장으로도 취임해 후학을 양성하고자 했다.

1978년 납북된 최은희는 마찬가지로 납북된 신상옥과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탈출기’(1984) ‘소금’(1985) 등의 작품을 함께하며 배우, 영화인으로서의 페르소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1986년 오스트리아 빈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후 1999년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도 영화인으로서의 정체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질곡의 시대 가운데서 최은희는 말 그대로 영화와 같은 삶을 살다가 2018년 4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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