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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코너-하윤해] 볼티모어의 쥐



미국 민주당의 흑인 중진 일라이자 커밍스 하원의원. 올해 68세인 그는 흑인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변호사를 지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인종차별 타깃이 되면서 원치 않게 전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었다.

커밍스 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이들은 세 가지 이슈를 놓고 이미 혈투를 벌이는 중이다. 인종차별 논란은 네 번째 교전이다. 그래서 이번 인종차별 공격엔 정치보복 냄새도 난다. 커밍스 의원은 하원 감독개혁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다. 감독개혁위는 트럼프 행정부를 감시하는 하원 상임위다. 악연은 여기서 시작됐다. 감독개혁위는 트럼프 대통령의 사업가 시절 분식회계·재무비리 의혹을 조사하고 있다. 이것이 첫 전투다. 감독개혁위는 트럼프의 회계법인에 그가 사업했던 10년 치 재무문서를 제출해줄 것을 요구했다. 회계법인은 “소환장을 보내주면 제공하겠다”고 답했다. 트럼프는 “소환장 집행을 막아 달라”고 소송을 냈다. 그러나 트럼프는 1심에서 졌고 항소했다. 두 번째 교전엔 트럼프의 딸 이방카와 사위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보좌관이 끼여 있다. 감독개혁위는 이 부부가 개인 이메일 등을 통해 정부 업무를 수행했다는 의혹을 조사하고 있다. 또 법률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이들에게 비밀 취급 권한이 부여됐다는 사건도 살펴보고 있다.

트럼프의 반(反)이민정책은 세 번째 전장이다. 감독개혁위는 “미국·멕시코 국경 이민자 수용시설이 비위생적이며 과밀 상태에서 운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커밍스는 “그 곳에서 정부 주도의 아동 학대가 이뤄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트럼프는 인종차별 공격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면서 커밍스의 지역구인 메릴랜드주 볼티모어를 건드렸다. 트럼프는 지난 27일 트위터에 “(미·멕시코) 국경은 깨끗하고 잘 운영되고 있다”고 운을 뗐다. 이어 “커밍스의 지역구는 미국에서 최악”이라며 “쥐와 설치류가 들끓는 난장판”이라고 비판했다.

커밍스는 1996년부터 볼티모어 제7선거구에서 내리 13선을 했다. 미국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볼티모어 시민의 흑인 비율은 62.8%다. 백인은 30.3%다. 볼티모어는 미국 도시 중에서 흑인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 5위다. 커밍스를 겨냥한 공격에 볼티모어가 들고일어난 이유다.

지역 유력지 ‘볼티모어 선’은 28일자에 트럼프를 비난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쥐 몇 마리 있는 것이 쥐가 되는 것보다 낫다’는 제목이 걸작이다. 트럼프를 쥐에 비유한 것이다. 사설은 “트럼프는 그의 지지자들이 볼티모어 7선거구에 세계 최고 의료시설인 존스홉킨스 병원 같은 랜드마크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비꼬았다. 그러면서 “볼티모어는 그가 다스리는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의 일부”라며 “만약 여기에 쥐를 포함해 문제가 있다면 가장 큰 책임은 제일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트럼프)에게 있다”고 무겁게 질타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을 “백악관을 차지했던 사람들 중 가장 정직하지 못한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최근 미국 정치를 보면 선거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깊은 회의가 든다. 내년 11월 대선에서 승리하는 데만 혈안이 된 트럼프는 미국 사회의 금기였던 인종차별 문제를 건드렸다. 흑백 갈등으로 미국이 두 동강이 나든지 말든지, 대선만 이기면 된다는 위험한 계산이 깔려 있다. 한술 더 떠 트럼프 참모들이 인종차별적인 메시지가 백인 노동자층 결집에 도움이 된다고 결론 내렸다는 기사에 말문이 막혔다. 트럼프의 기에 눌려 침묵하는 공화당도 비겁하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한국 사정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한·일 갈등 쓰나미 속에 북한이 단거리탄도미사일을 쏘고 러시아 군용기가 우리 영공을 넘는 일이 벌어져도 여야 모두 표 계산에만 여념이 없는 듯하다. 이들에게 ‘쥐가 돼서는 안 된다’는 볼티모어 선의 사설을 권한다. 정치권의 쥐를 가려내 표로 없애는 것은 유권자들의 책무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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