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게임 체인저, 홀리 체인저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세계적 경영전략가 피터 피스크가 쓴 책인데 어떤 일에서 결과나 판도, 흐름을 통째로 바꿔 놓은 결정적 역할을 하는 사람이나 사건 등을 말한다. 남들이 만들어낸 게임에서 ‘조금 더 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혀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 흐름을 주도하는 것이다. 미국의 애플이나 구글, 중국의 알리바바나 샤오미, 우리나라의 삼성 같은 기업 등을 말한다.

게임 체인저가 이 시대의 흐름을 바꾸고 이끌어가는 퍼스트 리더라면 또 다른 체인저가 있다. 바로 ‘홀리 체인저(holy changer)’다. 1990년대 미국의 40~50대 남자들 사이에는 경영 일선에서 은퇴한 후 모든 것을 뒤로하고 사막이나 산속에 은둔하는 것이 유행했다. 당시 미국 사회는 동양의 신비 종교에 호기심이 많았고 기독교 역시 개인의 영성과 명상 쪽으로 가려 했다. 이때 헨리 나우웬이나 필립 얀시와 같은 영성가와 작가들도 내면적 영성을 강조했다.

이 무렵 반기독교적 사상이 중심이 된 사회 이슈들이 급속하게 번져서 나중에는 정치적 이슈로까지 확대됐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목회자는 명상 신앙, 내면적 세계의 영성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개교회 성장과 개인의 영성만을 강조했다. 반면 교회가 추구하는 진리, 성경의 가치를 훼손하는 사상과 문화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정신과 사상, 문화를 주도하던 기독교가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게 됐다. 홀리 체인저를 스스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내면적 영성을 강조하는 것 외에도 특이한 게 또 하나 있다. 한국교회가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의 정신적 진원이 됐지만 급속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교회 역시 성장주의와 물량주의에 편승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향해 담을 쌓고 이너서클화 되고 종교적 카르텔을 형성하게 됐다. 그리고 교회가 세속화 물량화 사유화되면서 도덕적 투명성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시대와 사회를 향해 정의와 긍휼을 베풀지 못한 것이다.

소외된 곳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못 한 부분도 있다. 게다가 성경적 가치와 진리를 훼손하는 반기독교적 사상과 문화의 바람이 불어와도 무관심했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내면적 영성에만 몰두하고 한쪽에서는 물량적 성장에만 매몰된 것이다.

우리의 단점은 물량적 성장이나 내면적 영성만을 강조하고 홀리 체인저엔 관심을 두지 못한 것이다. 즉 교회라는 우물 안의 개구리, 기독교라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과연 제자들에게 그런 비전만을 주셨던가. 세상을 변혁시키고 바꾸는 홀리 체인저의 비전도 주시지 않았던가.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과 나 자신의 관계적 영성과 내면을 풍성하게 하는 내면적 영성을 넘어서 성경적 가치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고 세계관 전쟁을 해야 한다. 나는 이를 사상전, 문화전이라 칭한다.

이 시대는 사상전, 문화전을 하는 시대다. 프롤레타리아 유혈혁명에 실패한 사회주의자들이 좌절과 회의를 거쳐 새롭게 네오마르크시즘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문화적 헤게모니 이론이다. 네오마르크시즘 사상이 언론과 정치, 사회·문화에 스며들어 있고 심지어는 목회자와 크리스천의 영역까지 침투해 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 대부분은 세계관, 가치관 전쟁에는 아예 무관심하다. 교회 우물이나 기독교 틀 안의 개구리를 만들려고 한다. 안목의 지평이 좁기 때문이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쓴 ‘블랙 스완’이라는 책에서 말한 대로 평범의 왕국에서만 안주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홀리 체인저는 그러나 극단의 왕국을 지향한다. 우리가 언제까지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려고 하는가. 언제까지 평범의 왕국에서 안주하려고 하는가. 이제 우리의 시야를 넓히며 극단의 왕국으로 가자. 내면적 영성을 소유했다면 반기독교적 시대 흐름을 복음적 시대 흐름으로 바꾸는 홀리 체인저가 되자.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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