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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당연한 배상 외면하고 경제보복… 용서할 수 없는 일”

일본 시민단체 ‘조선인 강제노동피해자보상입법 일한(日韓) 공동행동’의 야노 히데키 사무국장이 지난 21일 일본 도쿄 사무실에서 국민일보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오른쪽)씨와 고 김규수씨의 부인 최정호씨가 지난해 10월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강제징용 손해배상 청구 소송 최종 승소판결을 받은 뒤 눈물을 흘리며 심경을 밝히고 있다. 최현규 기자


백팩리포트=국민일보 1~3년차 청년 기자들이 백팩을 둘러메고 세계 곳곳 이슈의 현장을 찾아간다. 젊은 기자들은 갈등의 현장에서 현지인들을 만나 그들의 생각을 듣고, 문제를 풀어낼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뚜렷한 해법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이 깊어지고, 고민을 나누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지난 21일 일본 도쿄의 도쿄구정회관특별구협의회 15층의 한 사무실 앞. 흰색 문 중앙에는 ‘아베 내각은 퇴진을!’이라는 문구가 쓰인 붉은색 배경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사무실에는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 노동자와 관련한 서적, 자료들이 곳곳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야노 히데키씨는 노트북으로 분주히 작업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 25년간 한국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을 돕고 일본 기업들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해온 시민단체 활동가로, ‘일본의 양심’으로 불린다.

야노 히데키 ‘조선인 강제노동피해자보상입법 일한 공동행동’ 사무국장은 이날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일본의 당연한 의무인데 이를 외면하고 한국에 무역규제를 하는 것은 보복에 불과하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며 최근 아베 정권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강화 조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 이후 한국 언론과 처음 인터뷰했다.

어릴 적부터 학생운동, 노동운동, 평화운동에 몸담아온 야노 사무국장에게 1995년 한 재일조선인이 찾아왔다. 강제징용 피해자였다. 재일조선인은 자신은 물론 주변에 강제로 끌려갔던 조선인들과 유족이 많다며 일본 기업에 소송을 걸고 싶은데 도움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유족들은 끌려간 가족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하는 마음에 항상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는 이들도 있었다.

야노 사무국장은 “당시엔 강제징용 문제가 과거사라 생각했는데 유족들이 직접 찾아와 이야기를 하니 이건 현재에도 이어지는 문제라는 것을 실감하게 됐다”며 “일본인으로서 너무나 죄송했다. 그 마음 하나만으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야노 사무국장은 우선 1997년 12월 강제징용 피해자인 고 여운택·신천수씨를 도와 오사카지방재판소에 당시 신일철주금(현 신일본제철)과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과 미지급한 임금을 달라고 소송을 냈다. 하지만 일본 법원은 1965년 한·일 양국이 체결한 청구권협정에 따라 개인에게 배상할 책임이 없다며 패소판결했다.

야노 사무국장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2005년 강제징용 피해자 여운택·신천수·이춘식·김규수씨와 함께 서울중앙지법에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1, 2심은 또 패소였다. 하지만 2012년 대법원은 일본 재판부의 판결은 헌법의 취지에 어긋나고, 신일철주금은 신일본제철을 승계한 기업이라며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다. 이듬해 서울고법은 신일철주금에 피해자 1명당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고, 5년이 지난 2018년 10월 대법원은 확정판결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모두 8번의 재판을 치렀다. 그 사이 피해자 4명 중 3명이 사망했다. 야노 사무국장은 최종 승소판결 소식을 듣지 못하고 눈감은 피해자들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8개월여 만인 지난 1일 일본 정부는 반도체 핵심 소재 등 3개 품목의 한국 수출규제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하면서 한·일 갈등이 급격히 심화됐다.

야노 사무국장은 유일한 피해 생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내가 소송을 걸어서 한·일 관계가 나빠진 것 같아 미안하다”고 한 말을 최근 전해 들었다. 그는 “아베도 사람인데,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라며 “나이 든 피해자가 자신을 책망하게 해선 안 된다. 책임은 어디까지나 양국 정치지도자들의 몫”이라고 분개했다.

최근의 한·일 갈등으로 정작 배상 문제는 관심에서 사라지는 게 야노 사무국장의 우려다. 그는 “나이 드신 분들을 위해 하루빨리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무역규제로 시선을 돌리는 느낌”이라며 “어떻게 배상을 빨리 할지에도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베 정권이 한국 정부와 ‘무조건’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야노 사무국장은 ‘법원 승소판결이 확정된 강제징용 피해자에게는 양국 기업이 1+1로 보상하자’는 한국 정부의 제안에 대해서는 “재판받은 사람 외에 수십만명의 피해자 문제는 어떻게 처리할지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은 불만”이라면서도 “우선은 한국이 양국 정부의 협의를 목표로 먼저 제안에 나선 것은 평가한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은 이마저 거절했다”며 “아베 정권은 한·일 간 긴장을 높일 게 아니라 지금이야말로 강제징용 문제를 해결하고 양국의 신뢰·우호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25년간 일본에 쓴소리를 해왔던 야노 사무국장은 특히 일본 극우세력들에게 문제의 인물이다. ‘최고의 반일 인물’이라는 비난을 듣는가 하면, 갑자기 전화를 걸어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는 “일본에선 여전히 내 말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적다”고 했다. 아베 신조 총리를 필두로 많은 일본인들은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에게 배상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 끝난 일인데 계속 생떼를 쓴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야노 사무국장은 “절대 다 끝난 일이 아니다”며 “국가 간 어떤 약속을 체결해도 강제동원의 역사적 사실을 지울 수 없고 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킬 수도 없다”고 단언했다.

야노 사무국장은 강제징용 문제 해결이 막바지에 온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대법원 (승소) 판결이 났으니까 시작할 때의 목표엔 거의 다다랐다”며 “근데 일본 정부가 그걸 막았고 기업들이 따라가고 있다. 마지막 고비”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마지막이 난관이다. 그는 “하아…어렵다”고 한숨을 쉬면서도 “더 할 수밖에 없죠. 좀 더”라고 덧붙였다.

야노 사무국장은 “앞으로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된 확실한 수치와 증거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문서화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정확한 정보를 일본 시민들에게 전달하고, 서명을 받아 아베 정권과 싸워가겠다는 것이다. 그는 앞서 자신이 20여년간 모아온 재판 자료들을 한국 용산에 위치한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달했고, 앞으로도 더 보낼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일본 전역에서 800여명의 시민과 12개 단체로부터 모금을 받아 이 박물관 건립에 1억345만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는 문재인정부도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달라 촉구했다. 야노 사무국장은 “나는 25년을 했다”고 웃으며 “문재인 정권은 이제 2~3년밖에 안 됐으니까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글·사진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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