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떼돈 번 맹인 점쟁이, 예수를 보다

1950년대 말로 추정되는 경기도 고양감리교회 성전건축 사진. 성도들이 깨끗한 옷을 입고 담소를 나누고 있다. 고양교회는 1897년 무렵 설립된 미국 남감리회 한국선교부 첫 교회였으나 1930년대 장로회와 감리회의 선교지 분할 정책에 따라 조직교회의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다 1954년 회복됐다. 이 컬러사진은 선교사가 찍은 것으로 판단된다. 고양교회 제공
 
1997년에 세운 100주년 표지석.
 
현재의 고양교회. 벽제관터 바로 옆이다.
 
백사겸 전도자 평전 표지.
 
백사겸 전도자 (1860~1940)
 
1950년대 말 새 예배당 완공 후 기념사진.
 
1960~70년대 추정 여름성경학교 사진.
 
백남석 연희전문대학 교수. 백사겸의 아들이다.
 
고양교회 박수웅 목사의 교회 안내판 설명.


지난 15일 서울 안국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삼송역에 내려 마을버스로 환승해 고양동시장에 내렸다. 고양감리교회(옛 고양읍교회)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7월 들어 ‘한국의 삭개오’라 불리는 맹인 전도자 백사겸의 삶을 좇아 경기도 고양, 연천 등을 탐사하고 있었다.

고양교회는 점쟁이에서 회심한 백사겸이 전도자로 사역한 곳이다. 벽제관 터 옆에 자리한 예배당 벽면에 여름 수양회 각종 프로그램을 알리는 현수막이 생동감을 준다. 교회 입구엔 1997년 세운 ‘기독교대한감리회 고양교회 창립 100주년기념비’가 자리했다. 1897년 설립됐고 1930년 폐쇄됐으며 1954년 재건됐음을 음각했다. 그 뒷면 ‘역대 담임자’로 ‘1898~1907 콜리어 선교사, 김흥순 전도사, 백사겸 전도사’라고 기록됐다.

지금의 고양교회 예배당은 그저 대리석 벽면으로 장식된 평범한 예배당이다. 100년이 넘는 한국교회 예배당 대개가 이렇다. 옛것의 불편함, 성장제일주의가 교회 건축에도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백사겸 선생님은 지금 팔십 고령의 성도입니다. …점이나 치는 복술가의 처지에서 지내다가 복음을 듣고 용감하게 신앙생활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가 40년이란 세월 동안 신실한 신앙생활을 해온 것을 일반인들까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1938년 9월 개성중부교회 목사 김종필)

양갓집 딸 아내로 맞은 ‘백 장님’

이 무렵 백사겸 전도자의 책 ‘숨은보배’가 ‘경성 동양선교회성결교회출판부’에서 발간된다. 김 목사는 책 발간에 따른 추천사에서 백사겸의 성령 충만한 삶이 성도와 교계에 퍽 유익이 됨을 얘기하고 있다. 개성중부교회는 미국 남감리회 조선 선교 거점도시로 개성에 있었고 개성선교부는 북부, 남부 등 수많은 교회 개척을 지원한다. 김종필 목사는 훗날 감리교회 감독을 지낸다. 백사겸도 회심 후 개성선교부의 지원 아래 개성남부교회, 장단읍교회 등을 설립한다.

평남 평원 출신인 백사겸은 평범한 농부 아들로 태어나 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아홉 살에 눈병으로 ‘장님’이 됐다. 그리고 몇 해 되지 않아 어머니마저 잃고 형과 단둘만 남아 거지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맹인’은 10명 중 8명이 복술업에 종사했다. 형 손에 이끌려 4년여 복술을 배운 그는 산통(算筒)과 죽장에 의지해 열다섯부터 대동강 줄기 따라 다니며 돈을 벌었다. ‘죽장으로 길등을 긁으며 사람들에게 처량한 신호를 보내고 근심 중인 그들을 유혹하여 불러 모았다.’(‘숨은보배’ 중)

한데 눈치가 빠르고 상황 판단이 정확했던 그였는지라 금세 명복으로 소문이 퍼졌다. 이때부터 그는 ‘백 장님’으로 불리며 떼돈을 벌었다. 활동 범위도 서울 이천 원주 등으로 넓어졌다. 장가갈 나이가 되어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자 “딸을 성한 사람에게 시집 보내면 일찍 죽는다”며 양갓집 딸을 아내로 맞았다. 부부가 정착한 곳이 고양고읍(현 고양시 고양동·벽제동 일대)이었다. 백사겸은 으레 인마로 모셔가는 우상의 우두머리였다.

그가 그렇게 호의호식할 때 조선은 부정부패와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백성의 삶이 더욱 궁핍해졌다. 무당은 길흉화복을 주관했다. 백사겸에게도 낙오된 인생들, 즉 창기 소첩 정신병자 등 버림받은 민중이 줄을 섰다. 동학, 정감록, 후천개벽 등 민중 종교가 우후죽순 생겼다. 백사겸은 한 서린 민중에게 연민의 감정이 있었고 나름대로 구도에 힘썼다. 그는 1897년 정월을 전후해 100일 기도를 했다. 그리고 기도를 마친 1월 12일(음력) 매서인 김제옥이라는 이가 찾아와 전도지를 주며 이리 말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도리를 적은 말씀인데 한번 읽어 보십시오.”

‘숨은보배’에는 이 권면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 있다. ‘나는 예수교에 반대한 터나 체면을 보아서 받기는 받았다. 그러나 독한 벌레가 손에 닿는 듯이 선뜻하였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백사겸은 환상을 보았다. “나는 예수다. 내가 주는 산통은 의의 산통이니 받아가지라.” 몇 날 며칠을 그렇게 꿈을 꿨다. 백사겸은 아내에게 전도지를 읽어 달라 했고 그 내용이 꿈속 예수의 말씀과 같은 것을 알고 “경 치는 일을 단연코 그만두겠소”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김제옥과 함께 회당으로 갔다. 고양읍교회였다. 그는 유명 복술가였던지라 바로 공중 기도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 해서 그간 자신의 삶이 술수와 기만이었음을 고백했다. “그리스도의 의가 있음을 몰랐다”고 했다.

불의하게 모은 재산 가난한 이들에게

지난 주말 오전. 고양시 첫 교회 행주교회(1890년 설립)에서 국민일보 주관 ‘믿음의 원정대’를 이끌었다. 고양 감리교회 첫 교회 고양교회와 40여 리(16㎞) 떨어진 곳이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행주교회에 1897년 초 회심한 백사겸이 정처 없이 길을 떠나 이곳에 도착합니다. 그는 불의한 방법으로 번 재산 3000여 냥과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주었습니다. 아내에게는 자신이 걸인 신세가 될 터이니 이혼해 달라 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길을 따르겠다는 아내는 걸인의 길에 지팡이가 되어 주죠. 행주의 성도들은 이미 소문으로 알고 있었죠. ‘회개한 고양읍 백 장님 오셨다’며 그를 강단에 세워 간증 부흥회를 합니다.”

원정대 참가자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한국의 삭개오 백사겸’이 자신들의 받을 딛고 있는 순례지와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날 원정대는 고랑포교회 옛터도 방문했다. 이 교회도 남감리회 개성선교부가 지원한 것으로 추측된다. 백사겸이 설립한 장단읍교회와 지척이다. 북한교회연구가 유관지 목사는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백사겸이 개성남부교회, 포천 감암리교회 등을 직접 개척했고 부인 이씨가 개성 동양선교회(성결교회)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백사겸은 1900년을 전후해 백정 선교에 앞장섰던 무어(한국명 모삼열) 밑에서 전도하다가 남감리회 첫 선교사 리드(이덕)로부터 정식 전도인(유급 전도인)이 됐다. 고양교회가 백사겸을 ‘전도사’라고 기록한 이유다. 백사겸 아들 백남석은 연희전문(연세대 전신) 영문과 교수를 지냈으며 현제명 곡 가곡 ‘가을’의 작사가이기도 하다. 백남석은 주일학교운동 선구자였다. 그의 아내 남숙희는 ‘고린도전후 주석’을 번역한 이로 보인다. 실로암 물로 백사겸 눈을 씻긴 예수 공로가 아닐 수 없다.

고양·연천= 글·사진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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