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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정현수] 한국에서 일본인으로 산다는 것



메구미(가명·33)는 한국에 사는 일본인이다. 그를 한국으로 이끈 건 한국인들이 보인 친절 때문이었다. 한국을 여행할 때마다 비행기에서, 길에서 만난 이들은 홀로 여행하는 그에게 어딜 가보면 좋을지, 숙소는 어디가 마땅할지 미처 묻기도 전에 자세히 알려줬다고 한다. 마치 원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가족처럼. 일본에선 경험하기 힘든 이런 분위기에 매료돼 그는 한국을 아예 삶의 터전으로 삼게 됐다. 물론 한류 문화도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특히 빅뱅의 태양을 좋아했다. 마음이 맞는 한국 남자를 만나 결혼도 했다.

2013년부터 쭉 한국에 살았으니 햇수로만 7년째다. 그에게 한국은 일본만큼이나 익숙한 곳이 됐다. 아직 스마트폰은 일본어로 세팅이 돼 있지만 한국 사람과 소통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고, 적당히 매운 음식은 곧잘 즐기게 됐다.

하지만 어지간한 한국 문화에는 익숙해진 메구미가 아직도 적응하기 힘든 순간들이 있다. 요즘처럼 과거사 문제로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격해질 때다. 물론 한국 사람들에게 일제 강점기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일본 사람들에게는 한국인들이 보이는 집단적 적대감은 갑작스럽기만 하다. 특히 아베 정부의 경제 보복으로 촉발된 최근의 반일(또는 혐일) 감정은 그가 지금까지 겪어본 것 중 가장 심하다고 한다.

아무리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해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메구미는 일상생활에서도 불안함에 시달린다. 예를 들자면 늘 일본어 과외수업을 하는 커피숍에서 하루는 차가운 녹차를 시켰는데, 카페 라테가 묻은 얼음이 들어 있었다. 또 어떤 날에는 당연히 챙겨줘야 마땅할 주차권을 주지 않았다. 그는 “물론 우연이었을 수 있고, 사소하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혹시 요즘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것 자체가 슬프고 힘든 일”이라고 했다. 역시 우연일 수 있지만 최근 가르치던 학생 두 명은 더는 수업을 듣지 않겠다고 통보해 왔다.

그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 아니냐는 사람들도 있을 테다. 그러나 동네 마트 매대에서 일본산 맥주를 빼버리고, 예정돼 있던 일본 여행을 줄줄이 취소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이 매일 저녁 뉴스에서 반복된다. 익명을 무기 삼은 인터넷 게시물이나 댓글에서 드러나는 공격성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메구미는 “당연히 모든 한국인이 그렇지는 않을 테지만, 그 사실이 언제 어디서 그 적대감을 마주할지 예상할 수 없다는 불안감을 해소해주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청와대는 공식 브리핑에서 ‘토착 왜구’라는 표현까지 서슴없이 써 가며 ‘너는 어느 편이냐’를 끊임없이 묻고 있다. ‘친일’과 ‘반일’이라는 양극단 사이에 있는 평범한 개인들은 도무지 설 곳이 없는 형국이다.

양국 정부는 이런 편 가르기에 열을 올리기 전에 그간 뭘 해왔는지 먼저 반성해야 할 때가 아닐까. 사태의 시작이 된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이 맺어진 지는 벌써 반세기가 넘었다. 당시 협정을 둘러싼 한국과 일본 간 해석의 차이는 그 긴 시간 동안 종종 외교적 문제로 돌출됐었다. 2012년 한국 대법원 판결이 대표적이다. 당시 주심이었던 김능환 전 대법관이 “건국하는 심정으로 썼다”는 판결문에서 대법원은 “국가 간 외교 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양국 국민의 청구권도 소멸했다고 보는 일본 정부는 당연히 반발했다. 이 해석차로 인한 갈등이 도돌이표처럼 무한 반복되고 있다.

이 갈등을 두고 양국 정부 중 어느 곳도 사태를 해결해 보려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사법부의 판단에 행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핑계 뒤에 숨었고, 일본 정부는 한국 산업의 주축인 반도체를 겨냥한 통상 보복으로 문제를 더 꼬이게 했다. 이제는 각자 자국민들의 반일·반한 감정을 이용한 대리전에만 몰두하는 양상이다. 한국과 일본이 모두 앞둔 선거라는 이벤트는 사태 해결을 위한 전략적 양보마저 어렵게 만들고 있다. 국가 간 대결 양상으로 번져버린 이번 싸움에서 정작 가장 할 말이 많을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

이제 양국 정부는 어떤 카드를 제시할 것인가. 대답이 늦어질수록 한국과 일본 사이에 낀 메구미와 같은 평범한 개인들의 삶만 더 각박해질 것이다.

정현수 이슈&탐사팀 기자 jukebox@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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