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장윤재] ‘걱정 인형’



한 사람이 해변의 모래밭을 걸어가면 그 옆에 나란히 고민의 발자국도 찍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 한다. 그만큼 걱정거리는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어쩌면 인생은 고민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청춘의 고민, 인간관계의 스트레스, 미래에 대한 막막함, 과거의 후회 등.

미국 애리조나주에 가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만드는 독특한 인형이 있다. 그 이름은 ‘걱정 인형(worry doll)’이다. 정확한 뜻은 ‘대신 고민해주는 인형’이다. 원주민들은 이 인형을 만들어 선물한다. 한 개가 아니라 한 번에 다섯 개씩 선물한다(그만큼 사람의 걱정이 많다는 뜻이리라). 한국의 쌈지처럼 생긴 작은 주머니 안에 다섯 개의 인형이 들어 있는데, 각 인형의 길이는 겨우 1센티미터 안팎이다. 손톱 만한 크기다. 하지만 색실을 감아 팔다리도 만들고 눈, 코, 입도 붙인 어엿한 인형이다.

언뜻 보면 장난 같지만, ‘걱정 인형’에 담긴 원주민들의 깊은 지혜는 아마도 이런 의미일 것이다. ‘고민과 씨름하고 있으면 고민이 나를 묶어 버린다. 고민은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오히려 쉽게 풀린다’. 고민에 빠지지 말고 그것과 거리를 두라는 말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걱정 인형’은 그렇게 고민과 자기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게 만드는 매개체다.

걱정과 고민과 근심이 없는 인생은 아마 없을 것이다. 걱정에 빠져 살다가 어느 순간 문득 저만치 서서 나무를 바라보듯이, 얼마만큼 거리를 두고 우리의 고민을 바라보면 그것이 그리 고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가 있다. 슬픔도 마찬가지다. 집을 세우는 기둥들이 서로 거리를 두고 서 있듯이, 어느 만큼의 간격을 두고 서서 슬픔을 바라보면 불현듯 그것이 그리 슬퍼할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걱정과 근심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기도다. 명상이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시면서 걱정과 고민이 많으셨던 것 같다. 인간이 된 신은 인간의 조건에서 비켜나 계시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의 생애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분은 쉬지 않고, 홀로,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슬플 때나 비통할 때,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기적과 치유를 베푸시기 전에, 그리고 베푸신 후에, 시련을 앞두고, 특히 시련의 한복판에서 늘 기도하셨다.

지금 내 삶이 눈물과 한숨으로 가득 찬 흙탕물 같다면 그 흙탕물을 맑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흙탕물 속에 뛰어들어 헤집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물속에서 걸어나와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다. 흙탕물을 맑게 하겠다고 거기에 뛰어들면 아무리 노력해도 물은 더 혼탁해질 따름이다. 거기에서 저만치 멀어져, 나와 그것과 거리를 두고 조용히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흙탕물은 곧 맑아질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고민과 슬픔이 끊어질 때가 거의 없지만, 내가 근심하는 일들의 대부분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인 경우가 많다. 그 문제들과 씨름하느라 어처구니없이 소중한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명상해야 한다. 기도는 세상의 모든 비본질적인 것들과의 단절이다. 모든 불필요한 정보와의 이별이다. 기도는 나 스스로가 만든 편견과 거짓과 두려움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사건 자체로 상처를 받기보다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 때문에 더 상처를 입는다”고 한다. 인간은 사물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마음속에서 미리 만들어낸 색안경을 통해 그것들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그 모든 허상과 거짓된 진실을 깨뜨려 나와 세상을 똑바로 보게 해준다.

마가복음 9장에는 귀신들린 아이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고민을 털어놓는 장면이 나온다. “왜 우리는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까?”(28절)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이다. “기도로 내쫓지 않고서는 어떤 수로도 내쫓을 수 없다.”(29절)

장윤재(이화여대 교수·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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