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장윤재] 평화는 정의 위에



기원전 3000년부터 지난 19세기까지 약 5000년 동안 인류가 역사에서 살상한 인명은 대략 3000만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난 20세기 100년간 인류가 전쟁을 통해 죽인 사람은 무려 1억명이라고 한다. 가공할 군사과학기술 덕분이다. 이런 통계를 접하고 나면 왜 역사학의 아버지라는 헤로도토스가 “인류는 역사에서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는지 이해가 간다.

올해로 6·25전쟁 발발 69주년이다. 많은 교회들이 6·25 직전 주일을 민족화해주일로 지킨다. 이 전쟁으로 민간인 약 250만명과 군인 약 70만명 등 도합 400만명 이상의 소중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언제 또 다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휴전’ 상태로 66년을 살아 왔다. 만약 제2의 한국전쟁이 터진다면 그것은 승자도 패자도 없고 민족 모두가 공멸하는 참혹한 핵전쟁이 될 것이다.

구약성서가 말하는 평화는 ‘샬롬’이다. 샬롬은 오늘날 쉽게 말하는 ‘평화’라는 말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물론 샬롬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까지는 똑같다. 하지만 샬롬의 의미는 더 깊고 넓다. 비록 지금 전시가 아닌 평시라 하더라도, 만약 우리 가운데 전쟁과 갈등의 불씨인 사회적 불의와 불평등이 있다면 성서는 그 상태를 샬롬이라고 보지 않는다.

샬롬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평화다. 샬롬이라는 성서적 평화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는 정의다. 샬롬은 ‘정의 위에 세워진 평화’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특별히 돌보시는 성서의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에 기초한 평화를 강조하신다. 사실 평화(平和)라는 한자에도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 평화는 공평할 평(平)자에 입 구(口)자를 더한 것이다. 그러니까 평화란 공평하게 밥을 나누어 먹을 때 실현되는 그 무엇이라는 뜻이다. 고대 중국인들도 고대 히브리인들과 비슷하게 평화를 이해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이와 같이 샬롬은 정의에 기초한 평화다. 미국 민권운동의 지도자 마틴 루서 킹 2세 목사가 “진정한 평화는 갈등의 부재가 아니라 정의의 현존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성서가 말하는 샬롬의 평화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둘째로 샬롬은 화해를 강조한다. 샬롬의 반대말은 히브리어로 ‘쉐다’인데 그 뜻은 ‘무엇이 깨지다, 쪼개지다, 상하다’이다. 만약 공동체 구성원 중 단 한 명이라도 사회적 불의와 무관심으로 ‘깨지고 상한다면’ 나머지 구성원이 다 행복하다 하더라도 성서는 그것을 결코 샬롬이라 부르지 않는다. 새끼손가락이 종이에 베이면 온 몸의 평화가 깨진다. 한 가정의 어린이가 병들면 그 집안의 웃음이 사라진다.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로 길거리에 실업자와 노숙자가 넘치면 그 사회의 통합은 무너진다.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그것이 균열되고 쪼개지거나 부서져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이 무너지면 그건 샬롬의 상태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평화를 꿈꿀 수 있고 평화에 대해 논의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시는 평화는 샬롬의 평화다. 그것은 정의에 기초한 평화다. 그것은 단 한 사람도 병들거나 헐벗고 굶주리지 않는 온전한 평화, 완전한 평화다. 그런 평화가 각자의 영혼과 가정 그리고 일터를 다스리게 해야 한다. 나아가 60년이 넘도록 여전히 휴전상태로 분단돼 있는 위태로운 이 민족과 나라 위에 넘치도록 해야 한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 이 세상에 샬롬의 평화를 만들어야 한다. 평화는 추상적이지 않다. 소외되고 배제된 자들을 찾아 돌보고 감싸줘야 한다. 그것이 평화를 세우는 방법이다. 시편에 있는 아름다운 말처럼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게”(시편 85:10) 해야 한다. 그렇게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복을 선포하신다. 산상수훈의 일곱 번째 선언이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복음 5:9)

장윤재(이화여대 교수·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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