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박영호] 냉소를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 많은 아픔이 있지만 가장 깊은 병통은 냉소이다. 경제가 어렵다지만 초근목피할 때도 있었고, 국론 분열이 심하다지만 더한 대립의 시기도 많았다. 폭압적인 독재의 기억도 멀지 않다. 그러나 그때는 함께 힘을 합해 잘 살아 보자는 의기투합이 있었다. 젊은이들이 모이면 나라를 걱정하고, 민주주의를 논하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다. 그러나 지금은 꿈을 말하는 이들을 보기 힘들다. 꿈과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 싸늘한 냉소만이 남아 있다. 한때 사회변혁을 꿈꾸던 이들도 제 한 몸 건사하기 바쁘고, 자기 자녀 좋은 학교 보낼 궁리에 바쁘다. 미래에 대한 고민은 노후대책이 전부이다.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얘기는 철 모르는 이들의 배부른 소리로 치부되고 만다. 왜일까? 그리고 언제부터일까?

2003년에 황산벌이라는 영화가 나왔다. 백제군 장수 계백이 가족을 죽이고 전장에 나가는 장면. 계백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며 칼을 드는데, 아내가 이런 말로 맞선다.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다.” 멸사봉공의 교과서 계백을 앞세운 국가 이데올로기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생명의 소중함 앞에, 평범한 백성들의 소박한 행복 앞에, 국가의 안위 아니 왕조의 안녕은 궁색한 깃발임이 드러났다.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도망간 선조에게는 백성의 삶보다 왕조의 안위가 더 중요한 가치였다. 그게 알려지자 백성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었고, 병자호란 때는 의병으로 나서는 이가 없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서 보는 싸늘함은 백성의 냉소가 만든 겨울왕국이었다. 그렇게 얼어붙은 한강을 넘어 청이 쳐들어왔고 조선백성 수십만명이 전쟁포로가 됐다.

맥락 없는 열정도 허무하지만, 냉소의 결과는 더 비참하다. 냉소는 공공선의 추구를 불가능하게 하고, 악의 승리에 기여한다. 냉소의 결과는 공멸이다.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계몽에 힘써왔다. 사회의 부조리는 사람들이 현실을 모르기 때문이지, 사람들을 깨우치면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전제였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백성들은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슬라예보 지젝은 오늘의 시민들은 “이데올로기적인 보편성 뒤에 숨겨져 있는 어떤 특정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한다. 자유나 민주를 외치는 것도 사실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한 수사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혹은 그래서 삶을 바꾸지 않고, 사회를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을 “계몽된 허위의식의 역설”이라 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예수님의 말씀이다. 불법을 저지르는 자들, 백성들의 헌신을 제 야욕을 채우는 도구로 쓰는 이들은 예부터 있어 왔다. 문제는 불법보다 사랑의 식어짐이다. 일부 대형 교회들이 사회법과 교회법을 스스럼없이 어기고, 목회자들이 입에 담지 못할 말로 사회의 지탄이 받고 있다. 정말 염려되는 것은 순수한 열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주님의 교회를 섬기던 이들의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 하는 질문은 우리가 냉소를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말과 같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마르틴 루터의 말에는 지금 나무를 심어서 언제 열매를 먹겠냐는 계산을 넘어서는 지혜가 있다. 마음에 희망을 품고 있어야 오늘 하루라도 제대로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희망, 살아있는 자의 의무”라고 말했다. 오늘 내가 열정을 기울이는 일이 내일 나에게 절망을 안겨줄 수 있다. 오늘 마음을 다해 사랑한 이가 내일 떠날 수도 있다. 그 상처가 두려워 마음을 닫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겨울왕국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음을 다해 사랑한 사람만이 그 사랑이 떠난 자리에서 다시 새로운 꿈의 불을 지필 수 있다.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유행가로부터 배운다.

박영호 포항제일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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