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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태원준] 고유정, 사이코패스가 아니어서 더 섬뜩한…



강력범죄 수사기록만 본다면 한국을 대표하는 사이코패스로 엄인숙을 꼽아야 한다. 스물아홉이던 2005년 24건의 범행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진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보험설계사였던 그는 가족과 친지를 보험금 타내는 도구로 여겼다. 신경안정제를 먹인 뒤 높은 데서 떨어뜨리거나 바늘로 눈을 찌르거나 방에 불을 질러 중상을 입히고는 보험금을 청구했다. 그 과정에서 첫째 남편과 둘째 남편이 사망했고 엄마와 오빠가 실명했고 가사도우미 가족이 불에 타 숨졌다. 경찰이 체포 후 사이코패스 검사(PCL-R)를 했다. 40점 만점에 25점 이상이면 사이코패스로 분류하는데 그는 40점이 나왔다. 심리학자 로버트 헤어가 개발한 PCL-R은 20개 문항으로 거짓말, 기만성, 충동성, 죄책감 등을 측정한다. 이 검사를 국내에 보급시킨 연쇄살인마 유영철이 38점,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이 29점, 연쇄살인범 강호순이 27점, 어금니 아빠 이영학이 25점이었다고 알려졌다.

반사회성 인격장애인 사이코패스를 흔히 “미치지 않은 광기”라고 한다. 이들은 조현병과 달리 환각이나 망상이 없다. 정상적인 현실감각과 인지기능을 가져 일상생활을 하지만 공감능력이 전혀 없어서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지 못한다. 유영철을 라이벌로 여기며 경쟁하듯 살인했던 정남규는 체포되자 “피 냄새를 맡고 싶다” “이제 살인을 못할까봐 조바심이 난다”고 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피에서 향기가 난다”는 자신의 감각에만 충실할 뿐 피를 흘리는 이의 고통엔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2017년 신혼여행 중 아내에게 니코틴 원액을 주입해 살해한 우모(24)씨는 PCL-R 검사 결과 26점이었다. 정신질환자인양 심신상실 주장을 폈는데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죄의식을 못 느끼는 사이코패스여서 오히려 재범 가능성이 높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고유정 역시 이런 사이코패스인 줄 알았다. 제주 펜션에서 전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해 여기저기에 버렸다. 그 수법이 너무 잔혹해서 어느 범죄학자는 “역대 가장 잔인한 범인”이라고 했다. 범행 도구를 사며 포인트를 적립하는 모습은 너무도 태연해 섬뜩했다. 그런데 경찰 조사에선 정신병력도 없고 사이코패스도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미친 광기’도 아니고 ‘미치지 않은 광기’도 아니라면 이 광기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사이코패스가 아닌 사람도 저런 짓을 하는 세상이라는 경찰의 발표가 더 섬뜩하다.

태원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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