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전남도청에는 신학도들이 있었다



문용동전도사기념사업회 총무인 도주명 목사가 16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킨 문용동과 류동운 두 신학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송지수 인턴기자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마지막 저항지였던 옛 전남도청에는 최후의 순간 목사도 신부도 스님도 없었다. 종교인으로는 유일하게 호남신학교(현 호남신대) 3학년 휴학 중이던 문용동(1952~1980) 전도사와 한국신학대(현 한신대) 2학년이던 류동운(1960~1980) 열사가 남았다. 계엄군 최후 투입 작전이 임박했던 순간, 문 전도사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기도를 인용했다. 류 열사는 “병든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집니다”란 글을 남겼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사회봉사부 사회문제위원회는 16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교회와 사회’ 포럼을 개최했다. 주제는 ‘5·18과 한국교회 그리고 신학도들’이었다. ‘문용동전도사기념사업회’ 총무인 도주명(전주 온교회) 목사가 ‘행동에 미치는 기독교의 종교적 동기의 가치’란 논문을 발표했다. 두 신학도의 행적을 추적한 발제였다.

문 전도사는 전남 영암 출신으로 광주에서 중·고교를 다녔다. 1970년 광주제일교회에 발을 디뎠고,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장로의 육영부흥회에 감화받아 예수를 영접했다. 73년 가을학기에 호남신학교에 입학했지만 군 복무와 가정형편 때문에 휴학과 복학을 반복했다. 직장생활을 하느라 학교를 쉬어야 할 때도 그는 광주제일교회가 운영한 야학인 ‘제일중등성경구락부’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사역을 계속했다.

문 전도사는 79년 7월 예장통합 전남노회 여전도회 파송으로 광주 상무대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다 5·18을 맞았다. 공수부대에 곤죽이 되도록 구타당한 시민을 업어서 병원에 데려다주다가 나중엔 시민군의 무기고 관리까지 맡게 됐다. 80년 5월 26일 계엄군 투입 하루 전 도청에서 나오라는 누나와 친구들의 설득에 문 전도사는 “도청 지하에 수류탄 총기류 TNT가 많은데 TNT가 폭발하면 도청 반경 5㎞까지 파괴된다”면서 “뇌관을 분리해 따로 보관하고 있지만, 나는 신학도로 주님 종의 양심으로, 이 위험한 폭발물을 방치하고 도저히 떠날 수 없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말을 되뇌며 기도함으로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문 전도사의 친구 윤상현의 증언이다. 문 전도사는 양쪽 가슴 및 오른쪽 손에 3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도청 진압작전의 마지막 희생자였다.

류 열사는 경북 포항 출생으로 부친이 광주 신광성결교회를 이끌던 류연창 목사였다. 한국신학대 신학과 2학년이던 류 열사가 남긴 글은 많지 않지만 25일 저녁 사실상 유서인 일기에 “누군가 병든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질 때 비로소 생명은 참답게 부활한다”며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라고 썼다. 그는 27일 새벽 계엄군에 의해 왼쪽 골반에 총탄을 맞아 사망했는데 주검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돼 사흘 후에야 지문으로 신원을 확인했다.

도 목사는 “두 신학도는 자기희생이라는 고난의 십자가로 역사의 부활을 꿈꾸도록 스스로 희생양이 됐다”고 말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