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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 ‘나이 수업’] 주려고 시작한 자원봉사, 오히려 노년이 풍성해졌다

<일러스트=이영은>




평일 낮 12시30분, 서울의 한 노인복지관 강의실에 점심을 서둘러 마친 어르신 50여명이 모여들었다. 각기 전화 말벗, 동년배 상담, 시니어 기자와 방송 진행자, 컴퓨터 수업 보조, 공연 봉사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며 ‘노년을 불태우는’ 자원봉사자들로, 그날은 자원봉사 관련 심화 교육을 받기 위해 자리를 함께했다.

강사로 불려갔지만 늘 그렇듯이 자원봉사하는 분들 앞에 서니 존경의 마음에 더해 아무런 봉사도 하지 않고 사는 부끄러움으로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먼저 어르신들께 봉사의 즐거움을 여쭈었다. 집에서 살림만 해서 사람 대하는 것이 서툴렀는데 친구도 많아졌고 생활에 활력이 생겼다, 직장 은퇴 후에 시간이 정말 안 가고 무료했는데 이제는 시간이 엄청 잘 간다,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다, 자식들도 자기 가정이 있고 자기 생활이 있어서 이제는 부모 도움을 원하지 않는데 나를 필요로 하는 데가 있다는 게 그저 고맙다, 자원봉사한다고 말하면 젊은 사람들이 조금은 존경하는 눈으로 봐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도 노인 자원봉사자로 길게 활동을 하셨다. 돋보기와 소설책만 있으면 내 노후는 걱정 없다고 하셨지만 막상 정년퇴직하자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좋아하는 책을 온종일 원 없이 읽고, 마당에 나가 꽃과 나무를 정성껏 가꾸고, 가끔 외출을 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밀려오는 허전함과 이제는 쓸모가 없어졌다는 무용감(無用感) 그리고 우울감이 점점 커져만 가는 듯 보였다.

그래서 아버지께 당시에 몇 곳 없던 노인복지관 중 한 곳을 소개하고 자원봉사 활동을 권유했다. 자원봉사자로 등록하고 교육을 받은 후 노인대학의 출석부 관리 등 업무 보조로 시작해 국어교사 경력을 살려 자서전 교실 수업은 물론이고 틈틈이 뇌졸중주간보호 어르신들께 가서 구운몽 같은 소설을 읽어드리곤 하셨다. 어느 자리에선가 아버지는 당신의 자원봉사활동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함경도에서 혈혈단신 남하해 이 땅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기까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고마움을 나이 들어 이렇게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힘이 닿는 한 자원봉사를 이어갈 생각입니다.”

이후 아버지는 가까운 동네 종합복지관으로 옮겨 한글교실 담임을 10년 동안 맡아 초등학교 2학년 정도였던 분들을 6학년 수준까지 지도해 초등과정을 전부 마치도록 하고는 자원봉사 활동도 마무리하셨다. 복지관에서 마련한 자원봉사 은퇴식에 아버지는 솜처럼 새하얀 머리에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어머니와 함께 참석하셨다. 인사말 중에 수업이 있는 날이면 교단에 서는 사람은 깨끗해야 한다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와이셔츠를 다려주던 아내에게 10년 자원봉사 근속의 공을 돌린다는 말씀을 하자 장내가 떠나갈 듯 이어지던 뜨거운 박수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자원봉사 어르신들과의 수업을 마치며 봉사활동을 원하거나 망설이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원봉사는 무언가를 주는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주는 것보다 받는 기쁨과 보람이 훨씬 더 크다, 다른 사람을 돕다 보니 내 문제에만 집착했던 성격이 변하고 시야가 좀 넓어지는 것 같다, 거창한 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하면 되니까 어렵게 생각하거나 겁내지 말자, 자원봉사하는 어른들이 좀 더 많아지면 노인혐오나 세대 갈등도 좀 줄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우리 마음속에는 착한 씨앗이 들어있는 게 분명하다. 바쁘게 살다 보니 그 씨앗을 돌볼 겨를도 없고, 막상 꺼내려 해도 쑥스러워 망설이지만, 해가 비치고 촉촉한 물기가 스며들면 자연스레 눈이 트고 싹이 나오는 것 같다. 세상을 좀 더 아름답고 살기 좋게 만드는 일이라고 하면 왠지 거창하게 느껴지고 능력 있는 누군가의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면서 나와는 거리가 먼 일로 여기기 쉽지만, 각기 다른 재능과 경험을 살려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야말로 이 힘들고 고단한 세상을 지켜낼 귀한 희망임이 분명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 8:28, 새번역)

유경 어르신사랑연구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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