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은 시대다] 거칠지만 감미로운… ‘나쁜 남자’의 보이스 메마른 감성을 적시다


 
가수 임재범은 풍부한 성량과 거친 음색으로 ‘국보급 보컬리스트’라는 평가를 받는다.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86년 밴드 시나위의 보컬로 가요계에 데뷔해 수많은 노래를 히트시켰다. 뉴시스
 
임재범의 대표곡 ‘너를 위해’가 담긴 4집 음반 재킷. 뉴시스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K팝의 주역은 보이그룹과 걸그룹이지만 이들이 활약하기 전 이 땅엔 무려 30년 전 세계 시장 진출을 꿈꾼 청년들이 있었다. 이들은 비록 대한민국에선 마이너 중의 마이너였지만 세계적 선풍을 일으키던 헤비메탈 붐에 힘입어 (자신들의 음악적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남루한(?) 조국을 벗어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꿈을 야심차게 설계했다.

새로운 보컬의 제왕

이들이 그런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의 스콜피언스, 브라질의 세풀투라, 일본의 라우드니스처럼 비영어권 출신 헤비메탈 밴드들이 세계 시장에 자리 잡은 1980년대의 분위기 덕분이었다. 우리라고 불가능할 리는 없지 않겠는가. 머리를 기르고 문신을 한 청년들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냉소적일수록 이들은 변두리 지하 연습실에서 의지를 불태웠다.

안타깝게도 이들의 소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구에서 압도적인 주류 장르인 록 음악의 진입 장벽은 상상을 초월하게 높았기 때문이다. 미학적 인프라는 존재하지 않았고, 밴드에게 필수적인 팀플레이가 성숙되기엔 징병제가 그것을 간단하게 허물어뜨렸다.

86년 ‘한국 록의 아버지’ 신중현의 맏아들 신대철이 결성한 헤비메탈 밴드 시나위의 리드 보컬로 단숨에 언더그라운드의 젊은 영웅으로 등장한 임재범은 자신이 리더가 된 외인부대와 아시아나를 통해 유럽 무대의 문을 두드렸지만 주목할 만한 성과를 얻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80년대 중반 한국 언더그라운드 중에서도 가장 변방의 비주류 장르인 헤비메탈 밴드의 보컬리스트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그는 백두산의 호랑이 같은 굵고 묵직하며, 그러면서도 금속성의 카랑카랑함을 담은 포효를 통해 소수 음악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90년대 한국을 지배하게 될 서태지 신해철 윤도현 같은 헤비메탈 키즈에겐 워너비 스타였다. 시나위의 데뷔 앨범 타이틀곡 ‘크게 라디오를 켜고’는 한국 헤비메탈의 역사를 열어젖힌 기념비적인 노래다.

그는 이승철과 김종서, 그리고 시나위의 까마득한 후배 서태지가 그랬던 것처럼 긴 머리를 자르고 91년 솔로 가수로 데뷔해 도시적인 우수가 가득한 성숙한 록 넘버 ‘이 밤이 지나면’으로 50만장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단숨에 정상권에 진입한다. 고단한 언더그라운드의 설움은 이렇게 보상받는 듯했다. 하지만 연이어 터진 표절 파동과 방송 펑크, 폭행 등으로 그는 기나긴 잠적에 들어갔다. 일찍이 80년대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두 영웅 전인권과 김현식을 넘어설 잠재력을 지녔다고 평가받았지만 그것의 실현은 아주 오랫동안 유예돼야 했다.

6년의 침묵이 흐른 후 그는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하며 ‘비상’과 ‘사랑보다 깊은 상처’ 같은 솔의 짙은 음영이 묻어나는 록 발라드를 선보인다. 30대 중반으로 돌입한 그는 더 이상 ‘로큰롤 베이비’가 아니었다. 여전히 세상에 대해 은둔의 스탠스를 지니고 있었기에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이 컴백 앨범은 20대부터 40대에 이르는 여성팬까지 유혹했다. ‘하이웨이 스타(Highway Star)’를 꿈꾸던 야수적인 (밴드 딥 퍼플의 멤버) 이언 길런이 도시적인 우수에 젖은 마이클 볼튼으로 진화했다고 하면 그럴듯한 비유가 될까. 특히 작곡가 신재홍(그는 ‘너를 위해’의 작곡가이기도 하다)이 제공한 ‘사랑보다 깊은 상처’는 이듬해 박정현의 첫 앨범에 임재범과의 듀오로 재녹음돼 가장 빛나는 혼성 듀오 곡이 됐다.

이 한 번의 숨고르기 직후 임재범의 짧은 절정기를 빛내는 두 장의 정규 앨범, ‘고해’(98)와 ‘스토리 오브 투 이어스(Story of Two Years)’(2000)가 연이어 발표된다. 헤비메탈의 초심으로 돌아간 세 번째 앨범의 타이틀곡 ‘고해’와 그의 생애 최대 히트곡이 된 4집의 ‘너를 위해’는 모든 보컬리스트들을 절망시키기에 충분한, 모든 상처의 기억들을 웅혼하게 승화하는 압도적인 절창이다. 세월과 함께 약간 쉰 듯한 그의 보컬은 아이돌 그룹의 유치한 보컬에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성숙함을 분만했다. 한층 느려진 템포는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여백을 창조했다. 가왕 조용필의 반대편에 설 ‘어둠의 제왕’의 보컬이 완성된 것이다.

클래스는 영원하다

길들여지지 않은 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순한 노래 안에서도 드라마를 만든다. ‘너를 위해’라는 명곡은, 임재범의 팬들에게는 김새는 소리겠지만, 사실 에스더의 97년 앨범에 수록된 ‘송애’라는 노래를 노랫말만 바꿔 재활용한 곡이다. 특이한 보컬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에스더의 원곡은 최원석의 가사였다. 에스더의 버전은 빛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묻혔다. 반면 강은경과 더불어 90년대 러브 발라드의 양대 여성 작사가로 꼽히는 채정은의 마법은 임재범의 캐릭터와 딱 들어맞는 새로운 노래를 탄생시켰다.

그것은 뉴 밀레니엄 초반부 한국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이슈로 부상하게 된 ‘나쁜 남자’라는 콘셉트였다. 그것은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에서 한 발짝 더 진화한 도시 남자의 캐릭터로 그 기원은 멀리 60년대 할리우드의 ‘안티 히어로’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티 히어로가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영웅성을 거세한 날것의 매력적인 남성성을 의미했다면, ‘나쁜 남자’는 외모와 능력을 두루 갖춘 도시적 매력남이되 여성에 관심 없거나, 가지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새로운 남성적 인간형을 말한다. 여기엔 나만이 그 남자를 길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는 여성의 숨은 욕망이 필수적으로 동행한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TV 드라마 남자 주인공 캐릭터는 엘리트 재벌 2세(개망나니 재벌 2세가 아니다!)이거나 전문직 엘리트가 주류였다. (일단 기본적인 능력을 갖춘) 이런 남자 주인공과 ‘밀당’을 거듭하는 여성 주인공의 디테일은 흥행의 성패를 좌우했다.

대중음악에서 ‘나쁜 남자’ 캐릭터의 출현은 연애담의 주체가 순정성을 잃어감을 의미한다. 임재범의 고도로 위악스러운 보컬은 전국의 모든 노래방에서 남자들이 임재범 스타일을 모방하는 데 몸부림치게 만들었다. 물론 거의 대다수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너를 위해’를 위시한 그의 많은 노래들, 가령 ‘비상’이나 ‘고해’, ‘아낌없이 주는 나무’, ‘새장을 열다’ 같은 일련의 노래들에선 상처 입은 남성성의 가학과 자학이 거칠게 표출된다. 이것은 명백히 전통적인 낭만적 연가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10대부터 로커였지만 사회적 이슈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의 반항은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본능 속에 존재했다.

‘너를 위해’가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 때에도 그는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어둠 속에 있었다. 미디어 담당자들은 그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 방식이 자아내는 폭력성을 두려워했다. 이 곡이 담긴 4집을 발표한 2000년이 그의 절정기임은 명백하다. 2004년 5집을 발표했을 때엔 그의 극렬팬을 제외하면 대중은 그의 신작이 나온 줄도 몰랐다. 그는 그렇게 잊히는 가수 중의 한 사람으로 묻히는 듯했지만 반전은 2011년 다시 벌어졌다.

201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최대 사건은 김영희 PD에 의한 MBC의 ‘나는 가수다’가 될 것이다. 크고 작은 사건들로 ‘나는 가수다’가 무너질 만한 상황에서 새로운 인물로 임재범이 등장할 줄을 예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단 3곡만 부르고 좋지 않은 스캔들을 일으킨 뒤 사라졌지만 그가 몰고 온 파장은 이 프로그램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었다.

‘가수’가 사라진 시대에 ‘가수’의 본질을 탐문하는 이 프로그램은 오랫동안 온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박정현과 김범수를 슈퍼스타의 반열에 올려놓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97년 IMF에 이어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심각한 양극화 위기에 내몰린 이 땅의 중년들에게 임재범의 등장은 잃어버린 자신의 세대 정체성을 회복하는 착시 현상을 낳았다. 그것이 비록 1년도 안 돼 허망하게 사라질 감정적 기만이라고 해도, 자신들의 문화마저 잊어버린 평범한 중년들에게 50줄에 들어선 임재범이 보여준 불굴의 노래 혼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의지를 제공했다. 그해 5월 이틀간의 컴백 콘서트가 열린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을 가득 메운 40~50대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열창을 지켜봤다.

본질의 힘은 위대하다. 그리고 클래스는 영원하다. 2011년의 컴백 이후 임재범이 또 한 번의 ‘비상’을 하지 못하고 서서히 추락한 것은 임재범과 그의 세대가 가진 한계다. 그러나 아직 죽지 않았음을 증명한 것만으로도 임재범의 가치는 충분하다. 아마도 그는 여전히 나쁜 남자로 남을 것이다. 그것으로 됐다. 하루가 다르게 패러다임이 이동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방향타를 잃고 방황을 거듭하는 중년들에게 임재범의 거칠고 탁하지만 강력하고 매혹적인 목소리는 마지막 남은 자긍심이며 마지막까지 남을 위안의 선율이 될 것이다.

강헌<음악평론가>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