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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당시 中지식인들 “세계 혁명사의 신기원” 극찬



“100년 전인 1919년 들불처럼 일어난 3·1운동은 우리 독립운동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우리를 ‘게으른 민족’이나 ‘속국’으로 보던 중국의 태도와 인식도 크게 달라졌다. 그해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동아시아 약소민족들이 펼치는 독립운동의 모범으로 반제국주의 연대의 출발점이 됐다.”

배경한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특임연구원은 10일 상하이 푸단대학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한·중 공동 학술 심포지엄(사진)에서 주제발표를 통해 3·1운동과 임시정부 출범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했다.

배 연구원은 “3·1운동 이전까지 중국인들은 조선의 망국(亡國)을 동정하면서도 ‘멸망할 수밖에 없는 무능’을 비판하고, 중국이 따르지 말아야 할 타산지석으로 삼자는 입장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중국인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1919년 당시 베이징대학 교수로 중국의 신문화운동을 이끈 천두슈(陳獨秀)는 “조선의 독립운동은 위대하고 절실하며 민의에 의거하고 무력에 의거하지 않음으로써 세계 혁명사의 신기원을 마련했다”고 극찬했다. 그는 3·1운동 전에 쓴 평론에서는 “(조선) 국민은 게으르고 남의 나라 속국이면서도 군신들은 탐욕스럽기가 세상에 둘도 없는 나라”라고 혹평을 했었다.

같은 해 중국 5·4운동 당시 베이징대학 시위를 이끈 푸쓰녠(傅斯年)은 “조선의 이번 혁명(3·1운동)은 비폭력 혁명이고, 불가능한 것을 알고도 실행한 혁명이며 순수한 학생운동이다. 오늘날 중국의 현실은 그야말로 탄식을 금할 수 없다”면서 중국 학생들이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3·1운동, 즉 조선의 학생운동을 꼽았다.

배 연구원은 “상하이에 만들어진 임시정부는 동아시아의 반제(반제국주의), 민주운동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출발점이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중국의 5·4운동이 3·1운동의 영향을 전적으로 받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3·1운동은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제기된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기대감에서 시작됐지만 5·4운동은 파리강화회의 결과에 대한 실망감에서 비롯됐다”고 차이점을 설명했다.

이번 심포지엄에 참석한 한국 독립운동사 전문가인 쑨커즈(孫科志) 푸단대학 역사학과 교수는 임시정부의 상하이 시절을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단언했다. 쑨 교수는 “상하이가 임시정부의 장기간 소재지이기도 하지만 상하이에서 민주공화정의 정체를 확립하고 독립운동의 기초를 세워 일본에 맞서서 한·중 통일전선을 구축했다”며 “임시정부가 중국에서 27년간 투쟁할 수 있던 것은 양국 인민이 모두 ‘순망치한’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의미부여했다. 칭다오과학기술대학의 스젠궈(石建國) 교수는 김원봉의 주도로 결성된 조선의용대가 중국 공산당 활동 지역으로 들어가 광복군과 갈라지는 과정에서 중국 국민당과 임시정부, 광복군 내부의 갈등을 조명해 눈길을 끌었다.

상하이=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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