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종로에 발 못 붙이게”… 한옥단지 만든 정세권 아시나요

서울 종로구 북촌한옥청에서 9일 개막한 ‘북촌, 민족문화 방파제-정세권과 조선집’ 전시회를 찾은 시민들이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서울시는 일제시대 민족문화를 지켜내는데 전 재산을 바친 민족자본가 정세권 선생을 알리는 전시회를 한 달간 연다. 뉴시스


한옥이 밀집한 서울 종로구 북촌은 흔히 조선시대의 흔적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사실은 근대의 풍광이다. 북촌 한옥단지는 일제시대인 1920∼1930년대 형성됐다. 북촌의 한옥은 전통한옥과도 다르다. 규모가 작고 필지 가운데 중정이 아니라 건물을 배치한 도시형한옥이다.

북촌 한옥단지 조성을 주도한 이는 건축사업가 정세권(1888∼1965) 선생이다. 그는 왕실과 양반층의 대규모 한옥들을 매입한 뒤 필지를 나눠 ‘조선집’이라고 불리는 10∼40평형대의 소규모 한옥을 신축해 서민층에게 공급했다.

북촌 한옥단지는 단순한 주택단지가 아니라 ‘민족문화의 방파제’이기도 했다. 1920년대 경성 남쪽의 일본 거류민 생활권이 북쪽으로 확장되고 일본식 집들이 늘어가는 현실에 위기감을 느낀 정 선생은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며 건축회사인 ‘건양사’를 설립하고 북촌과 종로, 서대문, 왕십리 등에 조선집을 지었다.

서울시는 9일부터 한 달간 북촌에 위치한 한옥 건물 ‘북촌한옥청’에서 ‘북촌, 민족문화 방파제-정세권과 조선집’ 전시를 연다. 일제시대 민족문화를 지켜내는데 전 재산을 바치고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한 전형을 제시한 민족자본가 기농(基農) 정세권 선생을 조명하는 첫 전시다.

정 선생은 집을 지어 판 돈을 우리말글을 지키는데 썼다. 3·1운동에 참가했고, 물산장려운동과 신간회를 적극 지원했다. 조선어학회를 위해서 신축 건물을 기증하기도 했다. 조선어학회는 그 건물 안에서 ‘큰사전’을 편찬했다. 그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가진 재산을 강탈당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우리 역사에서 묻혀있던 정 선생의 일대기를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조선어학회에서 만든 큰사전과 1990년 그에게 수여된 건국훈장 등도 볼 수 있다. 전시장 끝부분에서는 1930년대에서 1960년대에 제작된 한국 영화 중 북촌 한옥단지의 모습을 담고 있는 장면들을 상영한다.

전시장 인근 가회2층전망대에서는 ‘북촌, 한글… 그리고 정세권’이란 제목의 시민 대상 강연이 9일, 20일, 27일 3회 이어진다. 전시를 기획한 서해성 서울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 총감독은 “조선집을 지어서 조선말을 지켜낸 것은 더없이 아름다운 행위로 민족자본가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며 “이번 전시를 계기로 정세권 선생에 대한 본격적인 조명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정세권 선생을 기리는 의미로 ‘북촌한옥마을’ 버스정류장 이름을 ‘북촌한옥마을 정세권활동터’로 개칭했다. 또 정 선생이 지어 기증한 조선어학회 건물 터에 표지석을 설치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