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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코너-하윤해] 문재인팀, 1987년 한·미 관계를 보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제구력을 갖추지 못한 좌완 강속구 투수 같은 느낌을 준다. 가장 무서운 투수 유형이다. 공이 제대로 스트라이크 존에 꽂히면 ‘언터처블 피처’다. 컨트롤이 좋지 않기 때문에 타자들에게 공이 머리를 향해 광속으로 날아올 수 있다는 위협감도 준다.

그런 트럼프 투수를 상대로 문재인 대통령이 타석에 섰다. 쉽지 않은 승부다. 문 대통령은 잔꾀가 없는 교과서 같은 타자 유형이다. 투수의 흐름을 끊기 위해 의도적으로 ‘타임’을 부르는 행동 같은 것은 생각도 안 하고, 빈볼이 날아 와도 묵묵히 참는 스타일 같다.

‘트럼프팀’은 주장을 닮아 변칙 기술에도 능하다. 데이비드 스틸웰 국무부 차관보 지명자는 의회에서 “우리는 북한에 충분히 속았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관계가 좋다”고 흰소리를 하지만 참모들은 전략적으로 다른 목소리를 낸다. 대화를 제안하면서도 언제든 적대관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위협구를 북한에 던지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팀’도 주장 성향이 배어 있다. 진정성은 높지만 융통성에는 그다지 큰 점수를 주기 힘들다. 레퍼토리도 단조롭다. 얼마 전 워싱턴을 각각 방문했던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한·미 관계가 굳건함을 재확인했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 다음엔 “한·미 간 이견은 없다”는 말이 똑같이 나왔다. 그럴수록 한·미 간 골이 더 깊어진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강해진다. 트럼프팀은 강한 압박과 대화 제안이라는 양면 전술을 펼친다. 이에 반해 문재인팀은 공격수·수비수 구분 없이 같은 말을 던진다. 전술이 뻔하다 보니 역할 구분이 없는 것 같다.

문재인팀의 상황은 좋지 못하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 낀 형국이다. 이럴 때일수록 문재인팀이 의지할 데는 관중밖에 없다. 국민 여론이다. 하지만 문재인팀의 팬들은 반으로 줄었다. 취임 초기 80%가 넘었던 지지율은 반토막이 돼 한국갤럽 조사에선 41%까지 떨어졌다.

문재인팀의 실수는 대북 문제와 국내 문제를 분리해 사고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문재인정부의 경제정책에 불만을 가진 계층들은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북한 퍼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경계한다. 적폐청산에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은 “국내 반대세력은 괴롭히고, 북한 독재자 환심만 사려 한다”고 비판한다. 문재인정부가 싫어지니까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도 정이 가지 않는 기류가 확산되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팀이 역수순(逆手順)을 취했으면 좋겠다. 북한 비핵화 협상으로 국내 지지율을 올릴 생각을 버리고 경제정책 전환과 협치로 지지율을 먼저 반등시킨 뒤 거기에서 북한 비핵화 협상의 동력을 얻었으면 한다.

1987년 민주화 운동 시기 한·미 관계가 좋은 본보기다. 당시 조지 슐츠 국무부 장관은 “대통령 직선제만이 민주화를 위한 방안이라고 보지 않는다”며 민주화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당시 재야지도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런 미국을 향해 “직선제를 향한 한국 국민들의 열망은 막을 수 없다”고 압박했다. 워싱턴의 싱크탱크 전문가들은 “문재인정부가 추진하는 대북 제재 완화에 한국 국민들이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답을 듣기 위해 던지는 질문 같지는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서도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요구를 들어 줄 가능성은 낮다. 개성공단·금강산관광 재개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면 문 대통령은 국내 여론부터 결집시켜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웬만하면 미국의 입장을 들어주고 싶은데, 대북 제재 완화를 요구하는 국민적 열망이 너무 높다”고 압박하는 드라마 같은 장면을 기대해본다.

문 대통령은 11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비행기를 탄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장관 임명 강행으로 정치권이 또 멱살잡이 중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보고를 받아 한국 사정을 알 텐데, 문 대통령의 요구가 통할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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